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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Aug 09. 2024

전지적 반려곤충 시점

묘기를 한 번 부려볼까?
역시 반려인간이 이런 걸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아유, 내 이름은 '아유'가 되었다 @무지개인간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인간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무지개인간과 함께 사는 애벌레입니다. 뭐 반려곤충이라고도 하던데... 그럼 저는 무지개인간을 '반려인간'이라고 불러주어야 하는 걸까요? 아무튼 우리 엄마가 노란 알 속에 저를 두고 날아갔을 때는 고개를 들 때마다 하늘이 맑았다가 흐렸다가 밝았다가 어두웠다고 계속 변하던데,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뭔가 다른 곳으로 온 것 같아요. 하늘은 보이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더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노루잠을 자는 건데 너무 깊이 잠들었나 봐요. 하하, 애벌레가 '노루잠'이라니! 태어난 지 보름이 되었는데 벌써 배운 말이 참 많죠? 안 그래도 이 말, 저 말 다 들어서 노루귀만 해 질까 봐 걱정이에요.


  그러고 보니 인간은 서로 이름을 부르던데 제 이름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요 며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니 "아유, 귀여워.", "아유, 예뻐!"라고 자꾸 하는 것을 보니 제 이름은 '아유'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신이 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을 보니 기분 좋은 이름인가 봐요. 

  우리 집 반려인간이 저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하는데 연재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나 봐요. 안 그래도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께서 일러주었는데 저 인간이 계획도 없이 덜컥 잘 저지른다고 하시더라고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주저 없이 시작부터 한다나... 할머니의 할머니 때도 저놈의 '저지르는 습관'을 못 고치더니 제가 깨어나도 여전해요. 나중에 우리 아기가 깨어나면 또 일러줘야겠어요. 아직도 못 고쳤다고 말이죠.


  여하튼, 연재일인 금요일 밤 9시가 되었는데 반려인간이 그러더라고요.

이번 주에는 연재글을 쓰지 말까?

  

  뭐라고? 내가 주인공인 글을 안 쓴다고! 이건 너무 섭섭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직접, 본인 등판했어요. 갈고닦은 글쓰기 실력을 뽐내고 싶은데, 제가 곧 번데기가 되어야 하거든요. 휘날리는 필력 대신 실 뽑는 실력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해서... 여하튼 부족한 글짓기 실력이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드려봅니다.

  먼저 반려인간에게 우리 가문을 대신해서 인사말을 하고 싶어요.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거든요. 아침저녁으로 인간의 일터로 함께 출퇴근하면서 바람에 날아온, 옆 나무에 살던 애봉이, 뒷집 마당에 살던 애순이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가문은 반려인간 덕분에 대대로 먹을 복 하나는 넘쳤더라고요. 아침마다 싱싱하고 맛있는 잎만 따서 밥상을 차려줘서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왕 키보드를 잡은 김에 애봉이와 애순이를 비롯한 다른 애벌레 친구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뭐랄까, 반려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비결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어요. 그러니 다른 인간 여러분께서도 제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면 꼭 이 당부를 전해주세요.

  그럼, 미리 고맙다는 인사도 할게요. 고마워요!



  

  애벌레들아, 안녕!

  나는 2024년 여름을 살고 있는 호랑나비 애벌레, 아유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오늘은 심각한 기후위기 시대에 반려 애벌레, 반려 곤충으로 잘 살아남는 비결을 알려줄게. 진짜야.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돼.


  첫 번째, 청소를 잘하자!

  인간들의 화장실 사용 규칙에는 이런 게 있다고 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4번의 허물을 벗잖아. 간혹 자신의 허물을 먹어치우지 않아 반려 인간을 놀라게 하는 애벌레들이 있다더라고요. 허물을 벗은 뒤에는 꼭 자신의 허물을 냠냠 먹어 스스로 치우는 거야. 만약 버려진 허물을 보고 인간이 깜짝 놀란다면, 이것은 동거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우리는 예의를 갖춘 애벌레가 되자고.


아유, 내 허물은 내가 먹는다 @무지개인간

  

  화장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는 이렇게 생긴 마침표('.') 같은 똥을 누잖아. 자기 똥도 스스로 치우길 바라. 뭐 인간이 쓰는 화장실까지 똥을 물고 기어가서 버리라는 건 아니고, 입으로 앙 물어서 바닥으로 툭 던지는 거지. 처음에는 어려운데 하다 보며 힘이 생겨. 그래서 나는 요즘 취미로 야구를 좀 해볼까 싶을 정도로 잘 던져.


야구팀은 좀 무리지? @무지개인간


  두 번째, 자주 얼굴을 보며 눈을 맞춰야 해.

  반려인간이 골똘히 집중해서 일을 하거나 다른 것을 하고 싶을 때는 너도 그냥 잠을 좀 자면서 쉬어. 인간들도 그러더라고.

  '잘 때가 제일 예뻐.'

  이 말은 인간 아기들에게 하는 말인데 어른이 된 인간들에게는 다른 의미야. '잘 때'라는 것은 꼭 눈을 감고 밤을 보내는 게 아니야. 그냥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예쁜 인간, 잘하네'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좀 쉬면 좋아. 그러다가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인간의 얼굴이 불쑥 내 몸을 가리잖아? 그럴 때는 일이 끝난 거야. 일종의 인사 또는 안부를 묻는 것이지. 이럴 때는 아껴둔 묘기를 좀 부리면 좋아.

  

  아까 말했던 '허물 먹기' 있지? 그것도 얼마나 신기해한다고. 본 인간보다 못 본 인간이 더 많아.  똥 던지기 기술은 아주 놓치기 싫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난리더라고. 뭐 그냥 가장 쉬운 것은 삭삭 소리를 내며 잎을 먹는 것도 괜찮아. 인간들은 소리 내서 밥 먹는 것을 싫어하던데, 내가 소리를 내서 먹으니까 좋아하더라고?

  "조용! 아유, 애벌레 밥 먹는다. 소리 들어봐." 이러더라고요. 좋아하는 거 맞지?

  쪽쪽 물 빨아먹기 기술도 좋아. 신기하다면서 물방울을 또 가져오거든. 그래서 목마를 때 쓰면 아주 좋은 기술이야. 인간은 우리를 무척 신기해해. 그러니 이왕이면 안 보이는데서 먹고, 싸고 그러지 말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묘기를 부리듯 하나씩 보여줘 봐. 나도 우리 집 반려 인간의 반응에 자존감이 팍팍 올라가더라고.


반려애벌레의 먹방 ASMR @무지개인간


  요즘 우리처럼 작은 생물들은 참 살기 힘들잖아. 태양은 너무나 뜨겁고 내 주식인 잎은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자꾸만 바싹 타들어가고.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우리도 도움을 청할 줄도 알고 받을 줄도 알았으면 좋겠어. 생각보다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좋은 인간들이 많더라고. 옆에 월산마을에 사는 애필이는 잘 살아라며 먹이가 많은 나무로 옮겨주기도 했다더라고. 아, 떨려. 처음 이런 글을 써서 얼마나 떨리는지 내 심장소리가 들리니? 내가 할 말은 다 했나 모르겠어. 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이제 번데기, 성충이 되기까지 한 달 남짓 남은 '아유'의 이야기를 남겼으니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애벌레가 되었어. 나중에 나도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순간에 오면 꼭 인간들에게 정성을 다해 인사를 할 거야. 우리의 만남이 예쁜 모습으로 오래 기억에 남도록 말이야. 그게 내가 낳을 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부탁이기도 하니까. 우리 나비로 오래 살아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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