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기를 한 번 부려볼까?
역시 반려인간이 이런 걸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인간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무지개인간과 함께 사는 애벌레입니다. 뭐 반려곤충이라고도 하던데... 그럼 저는 무지개인간을 '반려인간'이라고 불러주어야 하는 걸까요? 아무튼 우리 엄마가 노란 알 속에 저를 두고 날아갔을 때는 고개를 들 때마다 하늘이 맑았다가 흐렸다가 밝았다가 어두웠다고 계속 변하던데,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뭔가 다른 곳으로 온 것 같아요. 하늘은 보이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더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노루잠을 자는 건데 너무 깊이 잠들었나 봐요. 하하, 애벌레가 '노루잠'이라니! 태어난 지 보름이 되었는데 벌써 배운 말이 참 많죠? 안 그래도 이 말, 저 말 다 들어서 노루귀만 해 질까 봐 걱정이에요.
그러고 보니 인간은 서로 이름을 부르던데 제 이름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요 며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니 "아유, 귀여워.", "아유, 예뻐!"라고 자꾸 하는 것을 보니 제 이름은 '아유'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신이 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을 보니 기분 좋은 이름인가 봐요.
우리 집 반려인간이 저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하는데 연재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나 봐요. 안 그래도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께서 일러주었는데 저 인간이 계획도 없이 덜컥 잘 저지른다고 하시더라고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주저 없이 시작부터 한다나... 할머니의 할머니 때도 저놈의 '저지르는 습관'을 못 고치더니 제가 깨어나도 여전해요. 나중에 우리 아기가 깨어나면 또 일러줘야겠어요. 아직도 못 고쳤다고 말이죠.
여하튼, 연재일인 금요일 밤 9시가 되었는데 반려인간이 그러더라고요.
이번 주에는 연재글을 쓰지 말까?
뭐라고? 내가 주인공인 글을 안 쓴다고! 이건 너무 섭섭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직접, 본인 등판했어요. 갈고닦은 글쓰기 실력을 뽐내고 싶은데, 제가 곧 번데기가 되어야 하거든요. 휘날리는 필력 대신 실 뽑는 실력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해서... 여하튼 부족한 글짓기 실력이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드려봅니다.
먼저 반려인간에게 우리 가문을 대신해서 인사말을 하고 싶어요.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거든요. 아침저녁으로 인간의 일터로 함께 출퇴근하면서 바람에 날아온, 옆 나무에 살던 애봉이, 뒷집 마당에 살던 애순이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가문은 반려인간 덕분에 대대로 먹을 복 하나는 넘쳤더라고요. 아침마다 싱싱하고 맛있는 잎만 따서 밥상을 차려줘서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왕 키보드를 잡은 김에 애봉이와 애순이를 비롯한 다른 애벌레 친구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뭐랄까, 반려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비결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어요. 그러니 다른 인간 여러분께서도 제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면 꼭 이 당부를 전해주세요.
그럼, 미리 고맙다는 인사도 할게요. 고마워요!
애벌레들아, 안녕!
나는 2024년 여름을 살고 있는 호랑나비 애벌레, 아유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오늘은 심각한 기후위기 시대에 반려 애벌레, 반려 곤충으로 잘 살아남는 비결을 알려줄게. 진짜야.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돼.
첫 번째, 청소를 잘하자!
인간들의 화장실 사용 규칙에는 이런 게 있다고 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4번의 허물을 벗잖아. 간혹 자신의 허물을 먹어치우지 않아 반려 인간을 놀라게 하는 애벌레들이 있다더라고요. 허물을 벗은 뒤에는 꼭 자신의 허물을 냠냠 먹어 스스로 치우는 거야. 만약 버려진 허물을 보고 인간이 깜짝 놀란다면, 이것은 동거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우리는 예의를 갖춘 애벌레가 되자고.
화장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는 이렇게 생긴 마침표('.') 같은 똥을 누잖아. 자기 똥도 스스로 치우길 바라. 뭐 인간이 쓰는 화장실까지 똥을 물고 기어가서 버리라는 건 아니고, 입으로 앙 물어서 바닥으로 툭 던지는 거지. 처음에는 어려운데 하다 보며 힘이 생겨. 그래서 나는 요즘 취미로 야구를 좀 해볼까 싶을 정도로 잘 던져.
두 번째, 자주 얼굴을 보며 눈을 맞춰야 해.
반려인간이 골똘히 집중해서 일을 하거나 다른 것을 하고 싶을 때는 너도 그냥 잠을 좀 자면서 쉬어. 인간들도 그러더라고.
'잘 때가 제일 예뻐.'
이 말은 인간 아기들에게 하는 말인데 어른이 된 인간들에게는 다른 의미야. '잘 때'라는 것은 꼭 눈을 감고 밤을 보내는 게 아니야. 그냥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예쁜 인간, 잘하네'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좀 쉬면 좋아. 그러다가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인간의 얼굴이 불쑥 내 몸을 가리잖아? 그럴 때는 일이 끝난 거야. 일종의 인사 또는 안부를 묻는 것이지. 이럴 때는 아껴둔 묘기를 좀 부리면 좋아.
아까 말했던 '허물 먹기' 있지? 그것도 얼마나 신기해한다고. 본 인간보다 못 본 인간이 더 많아. 똥 던지기 기술은 아주 놓치기 싫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난리더라고. 뭐 그냥 가장 쉬운 것은 삭삭 소리를 내며 잎을 먹는 것도 괜찮아. 인간들은 소리 내서 밥 먹는 것을 싫어하던데, 내가 소리를 내서 먹으니까 좋아하더라고?
"조용! 아유, 애벌레 밥 먹는다. 소리 들어봐." 이러더라고요. 좋아하는 거 맞지?
쪽쪽 물 빨아먹기 기술도 좋아. 신기하다면서 물방울을 또 가져오거든. 그래서 목마를 때 쓰면 아주 좋은 기술이야. 인간은 우리를 무척 신기해해. 그러니 이왕이면 안 보이는데서 먹고, 싸고 그러지 말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묘기를 부리듯 하나씩 보여줘 봐. 나도 우리 집 반려 인간의 반응에 자존감이 팍팍 올라가더라고.
요즘 우리처럼 작은 생물들은 참 살기 힘들잖아. 태양은 너무나 뜨겁고 내 주식인 잎은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자꾸만 바싹 타들어가고.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우리도 도움을 청할 줄도 알고 받을 줄도 알았으면 좋겠어. 생각보다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좋은 인간들이 많더라고. 옆에 월산마을에 사는 애필이는 잘 살아라며 먹이가 많은 나무로 옮겨주기도 했다더라고. 아, 떨려. 처음 이런 글을 써서 얼마나 떨리는지 내 심장소리가 들리니? 내가 할 말은 다 했나 모르겠어. 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이제 번데기, 성충이 되기까지 한 달 남짓 남은 '아유'의 이야기를 남겼으니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애벌레가 되었어. 나중에 나도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순간에 오면 꼭 인간들에게 정성을 다해 인사를 할 거야. 우리의 만남이 예쁜 모습으로 오래 기억에 남도록 말이야. 그게 내가 낳을 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부탁이기도 하니까. 우리 나비로 오래 살아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