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인간 Aug 24. 2024

똑똑, 여기 누구 있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제 애벌레는 사라졌습니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까지 다른 번데기가 하나 생겼을 뿐이지요. 무사히 번데기가 되었다는 것은 애벌레에게도 엄청난 일이지만 반려인간에게도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생사(生死)를 확인하는 관계이니까요. 아, 사실 반려 애벌레의 마음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지난밤에 잘 잤는지 별 탈은 없었는지 아침마다 반가운 마음을 나누지요. 왜냐하면 서로의 반려가 되었으니까요.

'아침이 되면 우리가 친절해지는 이유는 외롭게 잠을 잤기 때문이야.'
 - 김행숙, <네 이웃의 잠을 사랑하라>


  이번 여름에도 우리 집 반려 애벌레들은 무사히 번데기가 되었지만 모든 애벌레들이 번데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 속에는 더 많은 애벌레들이 희생되는데 가장 흔한 것은 기생벌, 기생파리 등의 습격을 받은 경우입니다. 나비 애벌레의 몸속에 기생 곤충이 알을 낳아 번데기가 될 나비 애벌레의 몸속에서 기생곤충의 애벌레가 나오는 일이 자주 있더라고요. 또 드물지만 번데기가 되는 과정에서 몸을 제대로 고정시키지 못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반려 인간이 옆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사나흘을 그대로 두었다가 번데기가 단단해지면 원뿔 컵 모양의 '엄마표 둥지'를 만들어주면 되는데 작은 생명을 구했다는 기쁜 마음도 듭니다.


엄마표 둥지 속에서 안전하게 날개돋이를 준비하고 있어요 @무지개인간


  무사히 번데기가 되고 나서는 잠을 자는지, 휴가를 왔다고 생각하며 푹 쉬는지, 아니면 평소보다 더 바쁘게 일을 하며 나비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2주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불러도 대답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 반려인간에게는 참 힘겨운 시간입니다. 매일 아침 '대답 없는 너'와 마주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걱정'이라고 쓰고 '불안'이라고 읽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거든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살아 있...겠지?'

  온 힘을 다해 번데기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으니 괜찮을 거라도 믿다가도 두려운 생각에 휩싸이고는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번데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일에는 온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요즘은 새로운 '반려 알'도 함께 살고 있답니다. 부화기에 유정란을 넣고 병아리의 부화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동안 사람이 해줘야 하는 부분 즉 온도와 습도를 잘 유지하며 검란을 통해 콩닥콩닥 뛰는 심장도 확인했지만 부화 예정일이 다가오면서 사람의 손길을 모두 거두었어요. 이제는 검란과 알 굴림(전란)을 중단하고 병아리가 작은 부리로 껍데기를 깨고 세상에 나오기를 지켜봐야 합니다. 마치 번데기를 바라보는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나오면 병아리, 남이 깨 주면 계란프라이가 된다.
 - J. 허슬러

  

  간혹 이 두려움이 머릿속을 벗어나 손 위에 내려앉으면 사달이 납니다.

  '오늘은 꼭 생사를 확인해야겠어'라는 생각이 살아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들을 건드리면 대부분의 경우 안타깝지만 미숙한 상태로 별나라로 떠나고 맙니다. 물론 저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지요. 처음 배추흰나비의 알을 채집했던 해, 번데기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건드렸다가 연약한 껍질이 찢어졌는지 결국 시커멓게 변하며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 키운 반려 애벌레가 반려 인간의 무지로 하늘을 한 번 날아보지 못하고 별나라로 간 것은 정말로 속상하고 슬픈 일입니다.


전 원래 불러도 대답이 없었잖아요. 잘 지내고 있다고 믿어주세요. @무지개인간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는 시간은 번데기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내가 참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번데기가 된 반려 애벌레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은 아이를 기르는 일과 무척 닮았습니다. 배추흰나비 번데기에게는 일주일치의 인내, 호랑나비 번데기에게는 약 보름치의 믿음이 필요하지요. 아, 아이(사람)에게는 살아있는 모든 시간에 걸쳐 희생과는 구분이 되는 배려가 필요한 것 같고요. 이번에도 반려 애벌레에게 인생을 배웠습니다

  번데기가 정한 시간을 채우는 동안 이제 반려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은 헤어짐을 준비해야 합니다. 더 오래 보고 싶고, 신비로운 과정을 함께했더라도 짧은 인사만을 나눈 뒤 가급적 빨리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창 밖에는 더 많은 친구들이 반려 애벌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전 06화 요즘 강아지들은 똑똑한 것 같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