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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Sep 01. 2024

씰룩씰룩, 곧 만나요

번데기가 된 K-애벌레

반려 애벌레 덕분에 알게 된 가장 놀라운 지식은 번데기도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엉덩이를 씰룩씰룩 @무지개인간


  

  그동안 알고 있던 지식이 와장창 깨진 날은 살았나 죽었나 궁금했던 배추흰나비 번데기가 배를 씰룩씰룩 흔들었던 어느 여름 오후였어요. 그동안 번데기와 겨울잠을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했던 저는 아주 깜짝 놀랐지요. 반려인간이 조금(어쩌면 조금 더) 건드렸다고 신경질적으로, 아니 그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경고의 꼬리질을 보내는 번데기를 보게 되었지요. 배추흰나비 번데기가 되고부터 일주일째 이어지는 긴 침묵을 깨는 움직임이 반가웠지만 얇은 번데기 옷이 찢어지면 어쩌나 싶었답니다.


  몇 년이 지나 놀란 가슴이 진정되고부터는 엉덩이를 씰룩씰룩하는 번데기를 보면 웃음부터 나옵니다. 왜냐하면 반려 인간의 눈에는 이 움직임이 '출필곡 반필면(나갈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뵌다)'처럼 보였거든요. 생사를 걱정할까 봐 혹은 건강한 나비로 날개돋이를 잘할 수 있을까 우려할까 봐 위로해 주기 위해 '아뢰는 것'처럼 보였어요. 우리가 부모, 자식 사이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런 사이였다면 반려 애벌레는 효도하는 K- 애벌레였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네 움직임 덕에 걱정 하나 덜었구나!'


번데기로 변신하는 호랑나비 애벌레, 땀방울을 그려주고 싶다 @무지개인간

  

  이런 마음까지 헤아리는 애벌레가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지 않는 순간은 언제일까?

  10년이 넘게 반려 애벌레를 지켜본 저는 '그런 순간은 없다'라고 말하는 증인이 되어 줄 겁니다. 왜냐하면 나비 애벌레가 반려 곤충이 되기 전까지는 저도 이들이 이렇게 열심히 사는지 미처 알지 못했으니까요.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뭇잎을 갉아먹고, 지나간 자리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흔적으로 남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찍 알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티를 내지 않는 겸손묵묵히 살아가는 뚝심을 보물 찾기처럼 숨겨놓은 창조주의 뜻이려니 생각해 봅니다.


  이제 반려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었고 우리는 작별 인사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지나친 관심보다는 사춘기 자녀를 대하듯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지켜보는 일만 남았지요.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번데기를 될 자리를 찾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고른 뒤, 주변에 보이는 사물의 색, 무늬와 비슷하게 번데기를 만든 반려 애벌레가 그저 기특하기만 합니다. 이때는 주로 녹색과 갈색 톤으로 번데기를 만드는데 더 많은 개체가 나비가 되기 위한 보호색입니다. 종의 생존을 잇기 위한 본능적인 판단을 보며 인간은 소명의 다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생인가 사유해 보게 됩니다.


  약 보름 동안 번데기로 사는 반려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사흘 전쯤이 되면 조금씩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날개의 무늬가 비치기 시작하고 머리 부분이 거뭇거뭇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눈까지 선명하게 짙어지면 번데기는 조금씩 움직이며 허물을 벗을 준비를 합니다. 배를 위아래로 움직여 배 부분의 주름을 하나하나씩 펴보면서요. 이때는 절대 정숙, 아이를 출산할 때처럼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어른 벌레인 호랑나비가 세상에 나오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아, 여기서도 짚고 넘어갈 것은 자연 상태에서 우화(번데기가 날개가 있는 성충이 되는 것)는 새벽이나 늦은 저녁과 같은 천적들의 활동이 잠잠한 시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절대 정숙'이란 반려 인간의 안정을 위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랑나비 번데기가 호랑나비가 되는 과정 @무지개인간

  

  이른 아침 혹은 이른 밤에 은밀하게 일어나는 우화, 이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면 큰 행운입니다. 그러나 '내 꼭 이 장면을 보리라'라는 욕심은 버리고, 호랑나비가 접힌 날개를 쭉 펴고 2~3시간 동안 잘 말릴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 주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무렵이 반려인간에게는 가장 마주하기 두려운 시간입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몇 년에 한 번 꼴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날개를 펴지 못해  쪼글하게 접힌 날개를 파닥이며 세 쌍의 다리로 힘겹게 걸어 다니는 나비를 만나야 할 때도 있고, 나무젓가락에 번데기를 만들도록 인위적으로 유도해 두었는데 우화 과정에서 나무젓가락이 넘어져 날개 한쪽 날개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늘 후회를 하지요. 자연의 순리에 맡기는 게 더 나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제 곧 호랑나비 한 마리가 세상에 머리를 내밀 것입니다. 사람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생이 그에게 주어지지만 늘 그렇듯 호랑나비는 알차게, 정성껏 그 시간을 살아갈 것 같아요. 반려 인간은 호랑나비가 천적을 피해 다니느라 잠이나 제대로 자고 다니는지 걱정이지만 그 사이 짝도 만나고, 그의 엄마가 그랬듯 좋은 나무를 골라 알을 낳고 한 세대를 이은 뒤 흩날리는 바람에 생을 마감하겠지요.


  가끔 왜 나비와 함께 여름을 보내는지 질문을 받아요. 왜 나비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대답을 할 수는 없지만 그저 좋아하는 일에 애정을 담는 것, 그것뿐이라는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때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반려 애벌레가 주는 선물이고요. 올해도 번데기에서도 예쁜 날개를 펼친 호랑나비가 무사히 나와 '이런 식의 도움이라면 적극 환영!'이라고 위로해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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