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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Aug 17. 2024

요즘 강아지들은 똑똑한 것 같아요

요즘 애벌레들도 엄청 똑똑해요

"우리 개뿐만 아니라 요즘 강아지들은 다 똑똑한 것 같아요."
 - 진짜, 요즘 애벌레들도 똑똑하더라고요.


  스무날의 여름 방학이 끝났습니다. 짧지만 그 사이 여름휴가도 다녀왔고, 아이들은 해보고 싶었던 것에 도전도 했어요. 무더위만큼 열정이 넘쳤던 여름은 지나고 보니 초록이 무성한 여름 나무처럼 각자의 방향으로 잎을 낸 것 같다는 여유가 듭니다. 그 사이로 가을이 오고 있겠지요. 그리고 오늘, 가을보다 먼저 '신나는' 개학이 찾아왔고요.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엄마 사람은 무엇을 할까,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는 의욕에 불을 붙였다가 여름 방학 동안에는 절대 누릴 수 없었던 고요한 자유를 택했어요.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 그러나 11시쯤 핸드폰이 울리자 고요한 자유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처럼 카페로 달려 나갔지요. 슈웅.


  아, 그리운 '남타커(남이 타주는 커피)'의 맛. 방학 동안 못 나눈 근황 토크가 마무리될 무렵 친구는 홈캠을 열어 함께 살고 있는 반려동물인 푸들 '윌리'의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우리 윌리는 또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휴대전화의 액정 속에는 현관 앞에 누워있는 윌리가 보였어요. 저라면 신나는 마음으로 소파 위에 올라갔다 침대에도 올라갔다 온 집을 귀가 날리게 뛰어다닐 것 같은데 '우리 윌리'는 망부석처럼 엄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윌리의 모습은 엄마의 빠른 귀가 욕구를 깨우지요. 그에 반해 우리 집 반려 애벌레는 다소 '시크'합니다. 그 녀석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지요. 우리 집에는 홈캠도 없지만 홈캠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작고 귀여운 아이가 화면에 잡히지는 않을 것 같고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의 대화는 반려동물로 넘어가지요.


  "우리 개는, 아니 요즘 강아지들은 보면 정말 똑똑한 것 같아."

  반려견이 없는 저는 요즘 개들이 얼마나 똑똑해졌을까 궁금해졌지만 '내 새끼'를 자랑할 순간도 놓치지 않았지요.

  "진짜! 요즘 애벌레들도, 진짜 똑똑해."

  이 무슨 대화의 흐름이람! 애견인은 웃고, 애충(愛蟲)인도 웃었지요.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도 좋았을 걸, 몇 마디를 더 얹고 말았지요.

  "올해 애벌레들은 유난히 더 똑똑해. 작년과는 달라. 밥 먹자,라고 말하면 먹는다니까."

  여기에서 어린 시절에 자연관찰 책을 두루 섭렵했던 독서가로서 꼭 밝혀두는 것은 애벌레는 귀가 없습니다. 혹시나 독자님께서 저 집 반려 애벌레만 귀가 있는 건가 착각하실까 봐 짚고 넘어가야지요.


  귀는 없지만 실제 애벌레를 키우거나 관찰을 해보면 이 녀석이 얼마나 똑똑한지 놀라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중 한 장면만을 뽑자면 번데기가 되는 과정이지요. 얼마나 놀라운지요. 연 3회 발생하는 호랑나비 중 가을의 초입에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그 해에 성충이 되지 않고 번데기 상태로 겨울잠을 자며 다시 따뜻한 봄이 오면 그제야 긴 겨울잠에서 일어나 날개돋이를 시작합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받아들이는 지혜를 이 작은 생명체가 어디서 어떻게 배웠을까 감탄을 하지요. 자연 속에서 자라는 애벌레와 달리 실내에서 자라는 반려 애벌레와 겨울잠을 자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집은 난방 시설이 잘 갖춰졌고 단열이 잘 되는 환경이라 자칫하면 한겨울에 세상에 나온 나비와 마주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늦여름까지 반려 애벌레를 키우고 호랑나비가 되면 날려주며 다시 여름이 될 때까지는 자연이의 순리에 따르고 있어요.


  놀라운 한 장면, 번데기가 되는 과정은 늘 신비롭습니다. 배추흰나비 애벌레 몇 십 마리를 키웠던 어느 해에는 먹이 식물인 케일이 자라는 속도가 애벌레들의 먹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해였지요. 그래서 5령 애벌레들의 먹이를 이틀 동안 중단하는 큰 결심을 한 적이 있어요. 배가 고파 죽으면 어떡하지 걱정은 되었지만 이제껏 애지중지 키운 애벌레들에게 마트에 파는 잎을 먹일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때는 꼬물꼬물 기어서 먹이를 찾으러 다니는 애벌레를 보며 '살 빠질라 그만 돌아다녀'라고 말하고 싶었지요. 

  먹지 못하면 힘 없이 축 늘어져 하늘을 보며 누워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벌레들은 아주 놀라웠어요. 먹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에 빠지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더라고요. 바로 번데기가 될 결심을 하는 것이지요. 번데기가 되면 먹지 않아도 되고 성충이 되면 알을 낳아 세대를 이을 수 있으니 어쩌면 곤충으로써 가장 정성껏 살아가는 것이지요. 아주 똑똑하게 말이지요.


  번데기가 될 결심을 한 애벌레는 어디서 실 뽑은 기계를 빌려온 것인지 갑자기 입에서 실을 뽑으며 필라테스를 하는 것처럼 아주 유연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번데기가 될 자리에 붙입니다. 위태롭게 몸을 고정하는 반려 애벌레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켜보는 반려인간은 혹시나 기운이 떨어져 번데기가 될 결심을 현실로 만들지 못할까 봐 내심 안절부절입니다. 그리고 애벌레가 이 과정을 완전히 끝내면 그제야 한숨을 돌리지요. 사실 이제껏 함께 살았던 수많은 반려애벌레들은 이 과정을 무사히 잘 해냅니다. 지켜보는 사람만 마음을 졸일 뿐이지요. 자신에게 알맞은 시기와 눈앞에 있는 달콤한 먹이 대신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는 우리 집 반려 애벌레가, 그리고 자연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번데기가 결심을 했구나 @무지개인간


 

  올해도 귀엽게 웅크렸다가 번데기로 변신한 호랑나비 애벌레가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도와줄 수 없어 외로운 그 과정을 이겨낸 멋진 애벌레들이지요. 

  

호랑나비 애벌레는 이제 번데기가 되었어요 @무지개인간

   

  우리의 일상도 홀로서야 하는 애벌레와 닮았습니다. 도움을 주고받거나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가족과 친구, 동료가 있지만 그들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나의 역할이 분명 있지요. 가장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한 발씩 떼며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한 날부터 매일 두 다리와 나의 의지로 스스로 걷고 있어요. 살아온 시간이 높이 쌓일수록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맡은 임무가 다소 외롭고 슬프게 느껴질 때도 있지요. 하지만 씩씩하게 해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에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호랑나비로 날개를 펴는 것처럼 사람도 성장하더라고요. 결국,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가장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법칙처럼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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