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몬순

제16장 F**K

by 만달

2020년 5월 6일

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Himachal Pradesh), 다람살라(Daramshala)



기한이 만료된 비자를 무시하고 체류를 시작한 이후 마음속 한 곳에는 단 한순간도 결코, 그곳에 없는 척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자리를 잡는다. 시간은 흘렀고, 스스로 선택하고 각오한 그 불편한 현실에 어느새 익숙해진 듯, 따라서 그 감정으로 인한 고통의 정도가 다소 약해진 듯 가끔이나마 느꼈던 것은 그냥 착각이었다. 하지만 이따금이라도 잊을 수 있었던 그러한 감정이 새삼스럽게 북 바칠 때마다 그 고통을 마치 오래된 병처럼 익숙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일종의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을 테고 난 어쨌든 매일매일을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불안과 공포에도 급이 있고, 때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더 큰 불안과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러한 경우란 아이러니하게도 특별히 더 큰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과 하필이면 겹치게 마련이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될 불편한 비밀로 항상 불안했고 그 비밀로 인해 나와 내가 누리는 (지금의) 모든 것들이 파괴될까 봐 느꼈던 공포는 가끔 가질 수 있었던 행복한 감정에 정비례했다. 시민도 아니고 합법적으로 등록된 외국인도 아닌, 나와 같은 불법체류자는 그가 이곳에서 얼마동안, 무엇을, 어떻게 성취하였든 간에 그 소유에 대한 법적인 권리의 주장이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언제든지 그가 누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자동으로 요구되는 위치인 것이다. 스스로 개발한 가게가 성장할수록, 아무것도 없었던 주머니가 점점 두둑해질수록, 옆에 있는 여자친구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렇게 나의 비밀을 알 리 없는 순진한 여자친구가 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소리도 없이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고통은 배가 되었다. 내가 가진 비밀이나 그와 함께 감추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친구. 우리가 함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우리가 함께 좋아하는 요리를 하는 그녀의 행복한 뒷모습을 보고 행여나 소중한 그 시간을 영원히 지키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기라도 하면 나는 곧 (또) 실수임을 깨닫고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주제 모르고 함부로 가진 그러한 기대 뒤를 쫓는 불안과 공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잠시나마 느꼈던 행복을 날카롭게 저격하고 결국 산산이 부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파괴될 때 비로소 또다시 찾아오는 것은 고통이다. 언제나처럼 가게에 앉아있을 나를 어느 날 어떤 누군가가 찾아와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비자를 확인하려 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이 곧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한 명의 불법체류자가 끝장나는 것은 그토록 간단한 문제임을 난 잘 이해했다.


어느 날, 또다시 찾아온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 나는 배낭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여권을 꺼내어 이미 수년 전 기간이 만료된 비자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Expiry date(유효기간)에 박혀있는 이미 오래전에 지난 날짜가 안타까워서 손톱으로 게으르게 긁어본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유효기간의 숫자들이 천천히 조각조각 벗겨지고 있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2008년의 파키스탄의 인쇄 수준? 조인트에 깊게 취해있던 나는 펜을 집어 들었고 어느새 깨끗이 비워진 유효기간에 내가 원하는 날짜를 그려 넣었다. 초점이 어긋난 눈동자로 비자의 새로 그려 넣은 날짜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혼자 만족하고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하시시의 효과가 지속하는 동안만큼은 여전히 유효한 비자를 가지고 있던 나는 훨훨 날아서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시시의 효과가 지속하였던 두 시간 동안 느꼈던 그 자유는,


’쿵, 쿵, 쿵, 쿵’ 요란한 천둥소리에 노크 소리가 묻혀버리기라도 할까 봐 문밖의 방문자는 있는 힘껏 나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바둑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누구? 이방으로 이사 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그의 무례함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문을 열었다. 집에서보다는 길에서 오히려 더 자주 마주쳤었던 나에게는 여전히 어색한 집주인아저씨가 서 있다. 그런 주인아저씨의 방문 목적은 당장 예상할 수 없었다. 커다란 중국제 스마트폰을 손에 쥔 아저씨의 얼굴은 어두웠고 당장 할 말을 찾지 못한 당황한 내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그 얼굴이 먼저 입을 열었다. “Show me your passport.”(여권 좀 줘봐.)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부터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인생이 연극이라면 드디어 새로운 장이 열리는 듯했다. 역시 예상치 못한 그의 요구에 조금 더 머뭇거렸고 “Sure.”(물론이죠.) 약 두 달여 전 새로 발급받은 여권을 염두에 두어 그렇게 대답했다. 1년 단기 여권의 모든 페이지는 여전히 백지상태였으며 출국비자만 있으면 귀국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는 인터넷 FRRO(인도의 외국인 출입국 관리 시스템)를 통해 그 과정을 준비 중이었다. “Here. It’s issued as a new.”(여기요. 새 여권이에요.) 그는 손에 들려있던 스마트폰으로 여권을 촬영한 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이 아니었음에도 커다란 그의 스마트폰 밖으로 새어 나오는 통화소리. 그들의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의 여권에 관심을 가진 원래 주체가 주인아저씨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고 그 사실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빨간불이었다. “And a visa?”(비자는?) 주인아저씨의 요구에 토를 달 필요는 없었다. 그는 집주인으로서 나에게 관련된 질문을 할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새 여권에 그가 요구하는 비자가 없는 이유를 설명해 보려 하지만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다. 대신 그와 전화 통화를 하던 상대방과 직접 대화를 시도한다. “Hello Mr. Choi how do you do? This is Daramshala police station speaking. By the way, my name is Priyanka.”(‘최’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다람살라 경찰서입니다. 형사 프리양카입니다.) 그리고 나의 변명을 알아들은 그녀의 요청에 따라 FRRO 인터넷의 출국비자 신청 페이지를 전송했다. “We will call back.”(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별일 아닐 것이다. 출국비자를 신청하던 중 록다운 때문에 행정업무가 중지된 건 사실이지 않은가? 주인아저씨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적잖이 당황한 나는 혼자 방에서 허둥대는 대신 또다시 게임 속 Battle(전투) 버튼을 클릭했다. “Let’s bring this show on the road.”(한번 놀아보자!) 편안한 커맨더의 명령과 동시에 내가 가진 가장 빠른 탱크를 무작정 적진에 들이대었다. 곧 원했던 대로 신나게 두들겨 맞았고 ‘쾅!’ 가장 먼저 파괴되었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스스로 최면을 걸어보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수많은 의심과 심장이 내는 빠르고 무거운 박동 소리로 터질 것만 같다.

“Useless trash! uninstall the game!”(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 게임 지워!)
"Noobs. Please get back to the F tutorial.”(초보자새끼. 씨발! 제발 튜토리얼 모드로 돌아가라!)
"Moron! Stick to Candy Crush."(병신아! 그냥 캔디크러쉬나 해!)
방금 전 누가 나를 방문하였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랑 통화해야 했는지 내게 주어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무것도 알 리가 없는 순진하고 무식한 그들로부터 얻어먹은 욕들은 잠시나마 내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주인아저씨가 그의 방으로 돌아간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쿵, 쿵, 쿵, 쿵’ 정확히 같은 매너의 노크 소리에 다시 문을 열었다. “Visa?”(비자?) 지치고 짜증 난 아저씨가 내뱉은 짧은 그 단어는 ‘Game over’(게임종료)를 의미했다. 경찰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한 채 사냥개와 같은 집요함을 보인다. 그 상황을 아무런 대미지 없이 피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차가운 비 내리고 축축한 바람 불고 번개가 번쩍하면 곧 천둥 치는 이 불쾌하고 어두운 저녁에 지친 건 주인아저씨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스스로 방어하려는 모든 노력이 귀찮았고 그 순간을 포기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올 것이라 예상만 하고 있던 그 시간이 결국 온 것임을 인정하고 그들이 의심하는 사실이 의심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면 될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사료되어야 할 사항들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구여권을 분실한 척 시치미를 뗄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하시시에 취한 채 펜으로 망쳐놓은 파키스탄 발행 인도비자도 구여권에 여전히 불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시도는 자칫하면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망쳐놓을 수도 있었다. 여권과 비자의 분실에 관한 증명을 요구받기라도 한다면? 파키스탄 방문 사실을 숨겼다가 차후에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무엇이 현명한 방법인지 판단하기에는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순순히 내주기로 한다. 나는 그냥 단순한 불법체류자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필요 이상으로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단은 주인아저씨를 그의 방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구여권마저 그에게 건네주었다. 아저씨의 못 생긴 중국제 스마트폰 반대편에서 소리가 새어 나온다. “Hold both of the passports and bring him to the station tomorrow morning by nine o'clock sharp.”(여권 두 개 모두 압수하시고 내일 아침 9시까지, 그분 경찰서로 데리고 오세요.) 내가 바라던 대로 주인아저씨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난 또다시 스크린의 Battle 버튼을 눌렀다.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방금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려고 벌써부터 예열을 시작하는 두뇌를 방해하고 싶었다. “Let’s bring this show on the road.”(한번 놀아보자고!) 그리고 또다시 적진으로 가장 먼저 뛰어들었고 기꺼이 그들의 사냥감이 되어주었다.'펑! 콰앙!'

...

[Guys? I’m so scared..](얘들아? 나 너무 무서워..)

여전히 전투 중인 아군들에게 고백했다.


“Everyone! report that brainless motherf**king monkey!”(야야야! 저 두뇌 없는 원숭이새끼 신고해!)

“SOB! never play Ranking again. f**king POS.”(개새끼! 두 번 다시 랭킹 모드에 들어오지 마! 씨발 똥조각 새끼)
“ㅅㅂ! 뭐 저런 ㅂㅅ새끼가! f**k you and your f**king 2inches!”(씨발! 뭐 저런 병신새끼가! 너랑 너의 5센티미터 좆, 엿이나 쳐드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