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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성식 Sep 21. 2023

대상전이

서울 기담집



  오늘 찾아온 남자는 의처증 환자였다. 아내가 잠잘 때만 웃는다며 꿈에서 불륜을 저지르나 의심된다고 했다. 상담소를 운영한지 10년 차인 나조차도 처음 겪는 케이스라 실질적 증거는 없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내는 본래 웃음이 없는 여자라고 대답했다. 크게 웃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고, 가끔 짓는 미소도 어색하게 입가를 찌푸리는 정도란다. 그런 그녀가 잠잘 때만은 만면에 홍조를 띠며 띄우며 한숨까지 몰아쉰다는데, 평상시의 냉담하던 아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다.


  “그 기분 이해해요. 저도 대학 시절 만났던 여친이 바람을 피웠거든요. 그녀의 친구로부터 몸 좋은 미남이라고만 전해 들었는데, 제가 모자란 남자였나 싶어 자괴감이 들더군요.”


  그는 나의 사연에 십분 공감했다. 잠자는 아내를 제지하지 못한다는 무력감과 함께 꿈속의 상대가 정체불명이라는 점도 피를 말린다고 했다. 외모나 재력, 화술이나 카리스마 등 자신이 녀석보다 못한 점을 모르겠다 보니 TV 속에 등장하는 연예인과 재벌, 스포츠 선수나 드라마 캐릭터가 덧씌워진다고 했다.


  남자의 말에 눈을 맞추며 경청했지만, 사실 나의 사연은 내담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상대방의 심리적 기제를 발견하려면 흔히 ‘라포’라 불리는 감정적 신뢰관계를 쌓는 게 중요하다. 남자의 경계심은 동질감 덕분에 손쉽게 허물어졌고, 상담을 마치자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나뿐이었다며 꾸벅 고개까지 숙였다.

  “환자한테 거짓말해도 괜찮은 거야?”


  그날 저녁, 밥상을 차리던 아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법률 상담도 아닌데 이 정도 양념은 치료기법 수준이지. 당신도 알겠지만 심리상담술이란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아. 상담사와의 소통 과정에서 심리적 문제를 자각하는 과정이지. 내담자들에게 필요한 건 속 편한 대화 상대라고.”


  아내는 석연찮게 고개를 저으며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다.


  “심리학 책에서 읽었는데, 대상전이라고 내담자의 증상이 전이되기도 한대. 보통 상담사가 상담 대상에 몰입해서 그렇다는데, 상대방에게 맞는 사연을 지어내는 것도 새로운 자의식을 만들어내는 행위잖아.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돼서라는 아내의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무슨 초짜도 아니고, 내담자와의 거리감은 유지하고 있어. 치료 중의 공감은 상담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연기일 뿐이고, 나의 사연이 가짜라는 것도 자각하고 있지. 이래 봬도 매일 아침마다 명상까지 한다고.”

  다음 번 상담에서 남자는 메모리카드를 가져왔다. 자신의 아내가 잠든 모습과 소리가 담긴 영상 파일이었는데, 포트에 꽂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검은 화면이 재생됐다. 녹음 파일처럼 뜻 모를 잠꼬대만 담긴 영상이었으나, 그는 아내의 비행을 증명하겠다며 스크롤을 뒤적였다.


  “여기, 여기부터 시작이에요.”


  잠에든지 세 시간쯤 뒤였다. 화면의 밝기를 높이자 옆으로 누운 여인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희미하게나마 웃는 표정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점차 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간헐적이던 잠꼬대가 아기들의 옹알거림처럼 연결됐고, 시험 삼아 움직여보듯이 입꼬리를 씰룩거리기도 했다. 비밀스럽게 유혹하던 쓴웃음에 콧소리가 섞이더니, 나른하게 한숨을 몰아쉬는 교태처럼 성숙함을 드러냈다.


  그러다 절정에 다다른 듯 눈꺼풀을 뒤집었고, 짧은 순간 위태로운 동공이 드러나며 그녀의 깊은 곳이 드러났다. 홍채의 주름까지 드러나는 활짝 펼쳐진 눈, 자신의 모든 것을 맛 보라는 숨김없는 도발에 나는 그만 등골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영화에서나 봤던 사랑에 빠진 여성의 눈빛이었던 데다, 그동안 만났던 연인들이나 지금의 아내에게서는 받아본 적 없는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째서 나와 결혼했어?”


  찌개 간을 맞추던 아내는 “글쎄, 잘 모르겠는데?”라며 웃어넘겼다. 조급해진 내가 “당신도 내게 좋았던 점이 있을 거 아냐? 사랑해서 결혼한 건 맞지?”라고 채근하니 허리춤에 손까지 얹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었나 싶어 절망하고 있으려니, 하나둘씩 변명 같은 답이 튀어나왔다.


  “우리… 대학 시절부터 만났고, 내가 당신 군 생활도 기다려줬고… 그다지 헤어질 이유도 없었고, 당신도 믿을 만한 사람이고… 그런 거지 뭐.”


  결국 사랑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들은 것도 연애 중반이던 20년 전이었다.


  “그냥 결혼할 때라서 한 거였네?”


  나도 모르게 나온 실언이었다. 아내는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으며, 나의 모욕적인 말이 충격적이라고 비난했다. 누굴 괴물이나 속물 취급하느냐며 분노하더니, 이불과 베개를 챙겨 옆방으로 들어갔다. 같이 살아야 할 이유를 되찾을 때까지 각방을 쓰자는 통보였다.

  다음 번 상담에서 남자는 거의 죽을상이었다. 이틀 전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내가 상체를 일으킨 상태로 실실대고 있었단다. 꼭 감은 눈은 보이지 않는 쾌락을 응시하듯 끈적끈적했고, 힘이 풀려 무방비한 몸은 무엇에든 자신을 허락할 것처럼 흐물흐물했다. 살짝 벌린 입에선 뜨거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이대로 아내를 빼앗겨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몸에 올라타 속옷을 벗기고 결합을 시도하려던 중, 남자는 제정신을 차린 아내에게 뺨을 얻어맞고 경찰 조사까지 받게 됐다. 다행히 형사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나, 친정에 돌아간 아내는 결혼 생활이 무의미하다며 변호사를 선임했다. 남자는 이혼 소송이 두렵다며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번만큼은 거짓으로 공감할 필요가 없었다. 주말이 지난 뒤 아내가 집을 나갔다며, 지금쯤 어디서 다른 남자와 뒹굴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아내는 내가 안다는 걸 모르지만, 대학 시절의 그녀는 툭하면 남자를 갈아치우기로 유명한 여자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허탈해하는 내게, 그는 부릅뜬 눈으로 되물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해결책이 필요한 건 제 쪽이죠. 그러니 상담실에 와서 돈을 내는 것 아닙니까? 저야말로 어찌하면 좋을까요?”


  나는 그저 들어줄 뿐이라며 회피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심리상담의 원리를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최대한의 현실적 조언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변호사를 찾아가는 건 어떨까요?”


  집에 돌아오자 거실의 불은 꺼져 있었고, 저녁밥은커녕 딱딱하게 굳은 찬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으로 법률상담을 검색했다. 미리미리 알아둬서 손해 볼 건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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