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웃는 얼굴을 오래 생각한다
별다른 표정이랄 게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일평생을 살아온 아빠가
제법 웃으며,
깔깔 웃으며,
심드렁한 나의 얼굴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웃느라고,
말하다 웃겨서 제대로 말이 안 나오는데도
좀처럼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아빠의 웃는 얼굴을 오래 생각한다.
표정없는 아빠에게
배시시 웃는 얼굴이 있음을 발견한 시간이었다.
아빠의 남은 여생이
이렇게 웃는 얼굴로 조잘대는 시간이면 좋겠다.
노인이 되면 단순해 진다는 건
본인에게도 자식에게도
어쩌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뭐라하든 본인은 들리지 않으므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
자신의 말을 뱉기 바쁜,
그러다 입이 고단해지면
밤새 떠드는 TV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잠을 잘 수 있는 노년.
이런 부모의 시간을 볼 수 있어
조금 행복하다.
20대에 마주한
할머니의 마지막은
인간 존재의 형벌처럼만 느껴졌는데,
나는 아빠의 얼굴에서
노인의 삶, 나름의 즐거움을 읽는다.
한때는
저 얼굴을
꼭 웃게 해 줘야지
다짐했던 날도 있었다.
이제 나도
내가 보아 왔던
부모의 나이를 따라잡으며
결국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삶에도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저마다의 희노애락을 쌓다가
생의 에너지가 다하면 떠나가는,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속성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내 삶의 이야기 뿐이라는 걸.
1942년에 태어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며,
저수지에 몸을 던지기 위해 집을 나선
엄마의 뒷모습에 오열하다 까무러친 7살 무렵,
젊은 날 꿈은 '카수'였고,
'아빠, 농사일 할 때 무슨 생각해?' 묻는 늦둥이의 질문에
'죽겄다, 하기 싫어 죽겄다'라고 답했던,
그러나 한 번도 주어진 현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인,
태어난 동네를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실존의 무제를 일평생 짊어진,
80세가 넘자 왠지 수다쟁이가 되어 가는,
늘그막 아버지의 얼굴로부터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