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리향 Oct 08. 2024

흥릉, 의외의 발견

  박사학위를 받고 나는 실험실에서 포닥 생활을 이어갔다. 하영 선배는 항공우주연구원에 합격했다. 나는 적지만 월급도 받았다. 나는 그 금액에도 만족했다. 포닥은 저널 논문을 써야 하기에 나는 H 중공업에서 사용하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기능을 한층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저널 논문을 쓸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교수님의 인내는 채 1년을 넘지 못했다.      


  ”언제까지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거냐? “

  ”회사에 들어가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고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거냐? “     


  나는 여기가 좋다고 말을 했는데 그러자 교수님은 발끈했다. 서울의 홍릉 연구소에서 사람을 찾으니 그곳으로  당장 가라고 했다. 누나가 그랬듯이 나는 다시 교수님에 의해서 쫓겨났다. 아 슬픈 운명이여~

  홍릉은 대학원이 대전에 내려오기 전에 자리한 곳이었는데, 그곳에 연구소도 같이 있었다. 보통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라는 기관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포닥생활을 새로 시작했다. 그런데 그곳도 사람이 죽으란 곳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나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에게 일머리 혹은 실행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수소 실험이었다. 무시무시한 실험이었다. 미래에 수소 전기차가 도로에서 돌아다니려면 수소를 충전할 수 있는 충전소가 필수인데, 수소 충전소는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안전을 위해서 수소는 누출되지 않으면 좋다. 그런데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수소가 절대 누출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해가 동쪽에서가 아니라 서쪽에서 뜨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소 누출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은 아니다. 따라서 위험관리 측면에서 누출이 일어난다는 가정을 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누출이 발생한다는 가정하에서 폭발 위협을 제거하는 반향으로 충전소를 설계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수소 누출이 발생할 때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수소가 누출될지 실험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가스 안전 공사에서 홍릉 연구원에 의뢰한 프로젝트였다. 전임자가 있었지만 전임자는 입질만 하고 그냥 다른 데로 가버렸다. 내가 봐도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할 일이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닌 나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일 자체가 지저분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연구 프로젝트가 그렇듯이 지저분했다. 명확하게 하나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오만 가지를 다하는 것으로 너덜너덜 해져 있었다. 프로젝트에 가시화라는 이상한 항목도 들어가 있었다. 내가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국가적으로 추격자 전략을 펼치는 한 어쩔 수 없다. 추격자 전략은 우선 남들이 하는 연구를 모두 따라 하다가 어떤 기술이 득세하면 뒤늦게 그 기술에 집중하는 전략이다. 이런 전략 속에서 프로젝트들은 잡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전략의 단점은 이미 선점자 혹은 선도자가 어느 정도 이득을 취한 뒤에 진입하기 때문에 진입했을 때는 시장의 단물은 이미 많이 빠진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크게 해 먹지 못한다는 소리이다. 통 크게 해 먹으려면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도자가 되겠다는 전략을 펼쳐본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 그동안 추격자 전략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전환도 쉽지 않다. 국가의 기술 정책도 성격과 같아서 한번 틀이 잡히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반도체도 추격자 전략의 길을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한 데는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시장을 읽지 못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우리 사회가 이 정도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데는 추격자 전략을 충실이 따랐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산업화 시기에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양질의 인력을 배출해 냈고, 기업가들이 미래를 위해서 투자를 아끼지 않은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으로는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대만에게 소득 수준에서 밀린 결정적인 이유에 선도자 전략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대만은 파운드리 분야에서 만큼은 선도자의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우리도 선도자의 전략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사람은 어떤 방식이 익숙해지면 그 방식을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추격자 전략에 익숙한 사회가 선도자 전략으로 방향 전환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거대 전략의 변화에는 그만큼 고통이 뒤따른다. 전략 변화에 성공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는 필수이고 시행착오는 비용이며 고통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변화와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다행스럽게도 전임자가 중요한 장비들은 이미 구매를 끝낸 상태였다. 나는 실재 측정에 사용될 작은 실험 장치들을 설계하면 그만이었다. 실험용 탱크에 저장된 수소는 800 기압으로 압력이 무시무시하게 높았기 때문에 압력에 대한 대비가 철저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가시화 장치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처음 듣도 보도 못한 것들하고 친해져야 했는데 나는 업체를 찾아가서 설명을 들으면서 광학의 기초를 닦아야 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나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가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이 일에 흥미를 느끼는 것만은 확실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사람들과 협상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현장에 나가 업체 사장님들과 협상하는 것을 즐겼다. 물론 내가 설계한 장치들이 실현되는 기쁨도 있었다. 투자 유치를 위해서 시연 장치를 설계할 때도 업체 사장과 만나 기술적으로 토론을 하고 설계를 변경하고 하는 것들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흥미가 있으면 일이 잘 진행되는 법이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한밤중에 천안의 생산기술연구소에서 펼쳐진 레이저 쇼는 장관을 만들어 냈다. 그 무시무시한 실험을 서울의 아파트 숲에서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천안의 생산기술연구소에서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것도 사람들이 퇴근하고 난 한밤중에 실험해야 했다. 수소 실험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컸기 때문에 낮에 할 수도 없었다. 변명을 하자면 가시화를 위해서 밤에 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젝트를 의뢰한 가스공사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나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한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홍릉 연구소에서 프로젝트를 깔끔하게 마무리한 뒤 대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대학원에 새로운 총장이 들어왔고 의욕에 넘친 총장이 신생 과를 여러 개 만들었는데 대학 동기가 신생 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도 H 중공업 출신이었다. 내가 회사를 나오기 1년 전에 회사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얼굴을 한번 본 정도였다. 나는 막무가내로 그 친구를 찾아가서 논문을 써 줄 테니 내가 여기에 좀 머물자고 제안을 했다. 그도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그 신생 과에서 연구 교수로 7년을 보내게 된다.

  분명 홍릉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에게 더 많은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홍릉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로딩 문제 2 상황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홍릉 연구실은 협소한 공간에 많은 사람이 근무했기 때문에 로딩 문제 2 상황이 발생하기 좋은 여건이었다. 사무실 근무는 나를 매우 힘들게 했다. 그나마 천안에서 진행된 실험이 나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 정말 갈 길이 멀었다. 나는 해결책의 실마리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상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관심은 아직 하부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좀 더 자유도가 높은 곳이 필요했고 모교의 연구 교수 자리는 그런 자리로 적합하다고 판단이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