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리향 Oct 08. 2024

대학원, 영혼의 둥지

  나를 받아준 교수님의 은혜에 성의를 표하려면 나는 부천에서 대전까지 오체투지로 내려가야 마땅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란 간사해서 그런 감사의 마음도 곧 잊어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교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실험실에서 까마득한 후배들하고 생활하면서 후배들이 교수님에 대해서 갖는 온갖 불만을 듣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후배들 앞에서 교수님을 두둔하며 대변인 역할을 했다. 나는 가끔씩 말하곤 했다. 니들 세상에 나가 봐라 교수님이 천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교수님이 만족하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다.

   어찌 되었든 내 손에 다시 4년이라는 연장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그 시간 안에 고질적인 로딩 문제를 해결하고 조각의 윤곽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원했지만, 여전히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답이란 녀석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어 입이 다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이 봐 친구 왜 그리 멍청한가? “

    ”엉뚱한 곳을 바라보면 그곳에는 답이 없다네! “

    “더 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릴 친구고만“     


해답은 누가 찾아 주거나 스스로 찾아오지도 않는다. 내가 찾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엉뚱한 곳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고생을 덜 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로딩 문제 해결책을 상부에서 찾고 있었다. 상부만 들춰 보고 구석구석 살피는 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나는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의식을 몰아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대부분 다른 생각을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호흡법에서는 잡념을 제거하기 위해서 의식을 하복부에 집중한다. 호흡법단체마다 그 정확한 위치가 조금씩 다른데 나는 해결책이 담긴 의식 부위를 찾아 헤맸다. 초기에는 의식 부위가 한동안 하복부 몇 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나중에는 가슴, 얼굴, 그리고 머리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다 보면 한번 훑고 지나간 자리를 다시 찾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나는 십수 군데나 되는 의식 부위들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나는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가운데, 나는 우연히 하영 선배를 알게 되었다. 부평 도서관의 문형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누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전산유체역학 실험실 석사 출신으로 현재 연구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연구원 박사과정은 회사에 적을 둔 채 박사학위를 따려는 사람들이 이용한다. 그러니까 그는 석사 과정의 대학원 1년 선배였다. 나는 선배를 본 적이 있었겠지만 기억이 없었다. 그 실험실에 자주 간 것도 아니다.

  우리는 바로 절친이 되었다. 문형과 함께한 패턴이 새로 시작되었다. 환경은 어느 모로 보나 부평보다 월등히 나았다. 우선 대학원은 널찍한 운동장도 가지고 있었다. 운동장 너머 학부 건물을 지나면 산책하기 좋은 잔디밭도 있었다. 잔디밭 사이사이로 나무들이 늘어선 소로를 걸을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산책하기 매우 적합한 공간이었다. 그 좋은 환경을 두고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학원은 늘 수도원처럼 한산했다. 대학원이 사람들로 붐비는 때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때뿐이다. 대학원은 대전에서 벚꽃이 유명한 장소인지라 그때에는 사람들로 제법 소란스러워진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 좋은 환경을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점심을 같이 먹고 기계 공학동 로비에 앉아서 혹은 캠퍼스를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부평에서와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부평에서는 내가 대화를 주도했지만, 하영 선배와 대화는 주로 선배가 이끌어 나갔다. 선배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H 중공업의 입담 좋은 선배에 못지않은 입담을 가지고 있었다. 말수가 적은 상대를 만나면 나도 장시간 대화를 이끌어 가기도 한다. 나도 대화를 참 좋아하는 편이다. 대화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하는데 리셋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없던 특성이다. 그러나 선배하고 있으면 늘 선배가 대화를 주도했다. 나는 듣는 것에도 제법 익숙한 편이다.

  선배와의 대화에서 아쉬운 점은 있었다. 역사적 철학적 지식에 대한 나의 갈증이 해소되지 못했다. 나는 인문학적 지식에 관하여 깊이 대화를 나눌 누군가를 갈구해 왔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공학적 지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즐비했다. 하영 선배도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책 읽기와 다큐멘터리 시청을 반복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개념이 정리되면서 이해도가 높아진다. 나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내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대답을 찾아야 했다. 인생의 숙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인생에 걸쳐 풀어야 하는 숙제가 두 개 있다. 첫 번째, 영혼 조각가로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우리 사회가 지닌 심각한 문제점의 근본 원인을 찾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숙제의 대답을 찾으려 나는 역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역사 다큐멘터리를 자주 시청했다. 수메르, 이집트, 앗시리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중국의 역사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청한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장면은 기원전 2000년 전에 수메르인의 삶을 대하는 자세였다.     


   ”사람은 죽는다. 먹고 마시며 즐기자. “

   ”그러나 인간은 당장 죽지는 않는다. “

   “그러니 저축을 하자 “     


이런 말을 기원전 2000년 전에 했다니 놀랍다. 그들이나 현재의 우리나 삶을 관통하는 지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플라톤이 이상국가로 스파르타를 지목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당시 아테네를 지금의 민주주의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당시 아테네 민주주의는 그리 정교하게 고안된 것도 아니고 그리 합리적으로 작동되지도 않았다. 난장판이었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패전국 아테네를 이상 국가로 삼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대상은 르네상스다. 그리스나 로마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역사이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오늘날 서양의 번성을 만들어 낸 단초를 제공했다. 르네상스가 피운 씨앗들이 서양의 지성을 흔들어 깨웠고 그 각성으로 오늘날 서양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한편 나는 로딩 문제로 인하여 후배들이 곤란을 겪지 않도록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후배들과의 접촉도 최대한 적게 가지려 노력했다. 실험실은 3층에 7, 8명이 수용 가능한 큰 방과 1층에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평수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의 구석진 쪽방을 따로 확보하고 있었다. 나는 쪽방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선배가 유배지 같은 곳에 스스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후배들은 매우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 듯했다. 후배들은 좌불안석이었다. 후배들 입장에서 나이 많은 선배를 그런 쪽 방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 다른 실험실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운 듯해 보였다.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얘들아 남의 눈을 무시하면 안 되지만 지나치게 의식해도 좋은 것이 아니란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해서이지 너희들에게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설득을 해야 했다. 내가 한번 고집하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와도 말리지 못한다. 나는 결국 1층의 구석에 위치한 쪽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상 이렇게 편한 것을 녀석들이 내 속도 모르고. 나는 그 방을 매우 사랑했다. 창문 앞에 목련이 자라는데 봄에는 하얀 목련을 볼 수가 있었다. 겨울에도 겨울 나름대로 맛이 있다. 특히 겨울에 차를 창문 앞에 대면 방을 나서기 전에 차의 엔진을 예열시킬 수가 있었다. 그 점은 그 방만이 지닌 장점이었다.

   나는 방을 꾸미기 위해서 만리향 나무 화분을 샀다. 나는 만리향에게 <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수>는 처음 입양했을 때 15센티 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학위를 받고 홍릉에서 일할 때에도 다시 대전으로 내려올 때에도 <수>는 늘 나와 함께했다. 홍릉에서 오피스텔에 살 때 <수>는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갈 뻔했다. 하지만 녀석은 꾸역꾸역 살아났다. 그때 누구한테 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수>가 나에게 유일하게 아름다운 꽃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딱 한 번이었다. 그때 나는 24평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실험실 방이 너무 어둡고 좁아 <수>에게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아파트로 녀석을 들고 왔다. 그리고 베란다에다 <수>를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그런 베란다가 화초나 <수>에게는 좋은 환경인 듯했다. 그 이후로 여러 아파트를 전전했는데 베란다가 모두 빈약했다. 그러나 24평의 구형 아파트는 큼지막한 베란다가 있었고 그 베란다는 너무 춥지도 그렇다고 너무 덥지는 않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 듯했다. 건강한 <수>는 나에게 단 한차례 꽃을 피워 보여주었고 아름다운 향내를 맡을 수 있는 영광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딱 한 번이었다. 다른 아파트로 옮기자 <수>는 더 이상 그런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구형 24평 아파트와 다르게 이후의 모든 아파트는 제대로 된 베란다가 없었고 <수>가 자라기에 그리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다. 환경이 열악하니 <수>는 점점 더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나 많이 아파”     


  2020년. <수>는 나에게 진지한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다른데 정신이 팔린 미친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죽고 말걸”      


이라고 말하는 듯 힘들어하는 <수>를 보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긴급하게 병원을 떠올렸다. 둘째 누나였다. 둘째 누나는 시골에서 나무도 많이 키우고 화초도 키웠다. <수>에게는 최고의 병원일 터였다. 나는 부리나케 <수>를 자동차에 싣고 시골로 향했다. 그리고 얘를 살려야 해라고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는 알았다고 무심한 듯 말하더니 구석 어딘가로 들고 가서 <수>를 내려놓았다. 누나는 역시 나무나 화초에게 있어서는 병원 의사 같은 존재였다. 누나네 집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수>를 찾았고 생기를 찾은 녀석을 보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녀석은 갈 때마다 상태가 좋아졌다. <수>는 그곳에서 행복한 듯 보였다. 나는 자신이 없어서 더 이상 <수>를 데려오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수>를 돌볼 시간적 여유를 찾을 것이다.


  방을 옮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후배들도 시큰둥해졌다. 원래 그렇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방을 옮기고 나서 내가 만족해하자 후배들도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단점은 있었다. 후배들과의 접촉이 자연스럽게 줄어들면서 실험실에서 후배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나중이 되어서야 후배들 사이에서 어떤 트러블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늘 한발 늦게 소식을 접다. 그러나 그런 일은 후배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내가 나설 수도 없고 내가 나서지도 말아야 한다. 나는 하영 선배하고 점심을 같이 먹고, 때로는 후배들하고 같이 점심을 먹었다. 하영 선배 하고 먹으면 나는 경청자의 입장을 취해야 했다. 후배들하고 식사할 때는 내가 이야기를 주도했다. 대화를 좋아하는 후배가 하나 있었지만 내가 있으면 양보를 했다. 내가 없으면 아마 그 녀석이 대화를 이끌어 나갈 것이다. 후배들은 대부분 다들 조용했다. 입이 매우 무거웠다.

  나는 후배들에게 전혀 모범을 보이지 못했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학부 후배이자 실험실 후배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가 작성한 프로그램으로 나는 졸업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대기업에서 의뢰받은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프로젝트 진행 도중에 그 후배가 졸업하면서 내가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후배의 프로그램을 개선하고 별도의 GUI 프로그램도 작성해서 프로젝트를 종료시켰다. 나는 그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저널 논문을 작성하고 졸업논문도 마무리 지었다. 로딩 문제의 해결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가운데 그렇게 나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