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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리향 Oct 08. 2024

부평 도서관, 영혼의 쉼터

내가 H 중공업을 퇴사한 명목은 MBA를 가기 위함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나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 수두룩했고 무엇보다 로딩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로딩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MBA도 MBA의 할아버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MBA를 마치려면 영어가 중요한데 나는 영어가 젬병이었다. 내가 그래도 쓸만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수학과 물리를 잘해서이지 영어를 잘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영어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그런 실력으로 MBA를 무리 없이 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에게 둘러댈 구실이 필요했다. 이점에 대해서 나를 이해해줘야 한다.

  그런데 그 새빨간 거짓말을 회사 사람들에게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셋째 누나에게도 똑같은 거짓말을 했다. 나는 MBA를 준비한다고 둘러대며 부천의 셋째 누나 아파트에서 얹혀 지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선생이었던 누나가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간 뒤에는 그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을 했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누나 내가 지금 심각한 정신병인 로딩 문제에 말려들어 있어. 그것 때문에 시간이 좀 필요해. 말할 자신이 없었다. 누나에게도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영어책을 들고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온통 교과서와 참고서 내용만 내 머리에 로딩되었다. 내 머릿속에 그 어떤 다른 문제도 로딩되지 못했다. 남들이 보면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를 했다. 3학년을 시작하는 첫날에 담임은 내 이름 불렀다. 그리고 일어서라고 했다. 연이어 네 사람의 이름이 더 불려졌다. 담임은 5등부터 1등까지 거꾸로 이름을 불렀다. 나는 5등이었다. 그 일이 아마 내게 자극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내 머릿속에 학업 내용 이외에 어떤 것도 로딩되지 않았다. 나는 누구 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청소시간이 되면 베란다에 나가 친구들과 몇 마디 섞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말주변도 없었다. 말주변이라도 있었으면 떠들고 그랬겠지만 그런 재주도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옆자리 짝꿍 녀석이 다른 자리로 가버렸다. 자기는 나중에 포클레인을 운전할 거라고 말을 한듯한데,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공부에만 집중했다.

  나는 한 달 뒤의 모의고사에서 4등으로 올라섰고, 세 달 후에 3등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을 더 제쳤다. 거기까지는 무난했다. 수학, 물리, 화학 등에서 1등을 했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가능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영어와 국어에서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내가 영어와 국어에서 적당한 점수를 확보했더라면 나머지 한 명도 제쳤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영어와 국어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었다. 나에게는 도움이 될 참고서도 없었다. 내가 처음 영어와 국어 참고서를 갖게 된 것이 3학년 때였다. 그전까지 내가 가진 유일한 참고서는 바로 정석 기본과 실력이었다. 2학년 2학기가 되자 아버지가 참고서를 사라고 돈을 주셨는데 그 돈으로 난생처음 수학 참고서인 정석 기본을 샀다. 그리고 곧 그 책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정석 기본이 너무나 쉽게 느껴지자 나는 누나에게 부탁해서 정석 실력을 샀다. 수학은 몇 개의 법칙을 이용하면 많은 문제를 한 줄로 꿰듯 해결할 수 있다. 정석 기본은 그리 많은 문제를 수록하고 있지 않았지만, 정석 실력은 두께도 만만치 않았다. 수록된 문제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 문제들의 중심을 관통하는 기본 원리 몇 개만 이해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그런 것에 재주가 있었다.

  3학년 때 나는 수학에 관심을 크게 쏟지 않았다. 이미 정석 실력의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다. 나는 다른 과목에 치중했다. 특히 영어에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수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어를 관통하는 기본 법칙이나 원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이것 역시 로딩 문제처럼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언어를 수학처럼 접근하려는 멍청한 시도를 했던 것이다. 당연히 결과가 좋을 리가 없었다. 빌어먹게도 이놈의 영어는 수학이나 물리와는 특성 자체가 다른 놈이었다. 이랬다 저랬다. 제 멋대로였다.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언어는 체질적으로 나와 맞지 않았다. 그 와중에 국어는 완전히 포기 상태였다.

  그런 집중력이 사람들로 가득 찬 도서관에서 더 이상 발휘될 수 없었다. 로딩 문제가 모든 것을 압도했다. 내가 정말 영어 공부를 원한다면 나 홀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악마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가 중요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내야만 했다. 미국에서 MBA과정을 밟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에서 해방을 원했다. 미국이고, MBA고, 금융공학이고 중요치 않았다. 그것은 해방을 이루어낸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나는 망했는데, 펀드 매니저나 트레이더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나는 로딩 문제 해결에 전력투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인간관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들과 만날 필요가 있었다. 로딩 문제로 옅은 인간관계만 가능했지만 그 안에서도 배울 것은 있었다. 맨날 도서관에서 혼자 치대는 것에 점점 싫증이 나기도 했다. 고민 끝에 나는 삼육 외국어 학원을 떠 올렸다. 대학원 석사 과정 중에 들어본 적이 있는 이 학원은 선교의 목적이 어느 정도 있어서 적은 돈으로 괜찮은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영어 회화를 배운다는 구실도 있었다. 나는 인천에 있는 삼육학원에 등록했다. 나는 그곳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어를 배우려는 인근 대학의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큰 누나 같은 아주머니도 있었다. 문형도 그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학원에 있을 때 나는 문형을 알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면 언어 학습실에 들러 테이프의 지시를 따라야 했는데, 그것을 마치면 저녁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데 급급했다.

  나는 우연한 계기로 문형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부천 중앙도서관에서 부평 도서관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부평 도서관이 더 가까운듯해 보이기도 했고 부천 중앙 도서관이 지겨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고 났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잘생긴 얼굴에 이목 구미가 뚜렷한 문형은 혹시 삼육학원에 다니지 않냐고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나는 되물었다. 그러자 자신도 그 학원에 다니고 있으며 사실은 지금 같은 반 소속이라고 했다. 나는 그게 정말이냐고 물었고 그는 맞다고 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같이 붙어 다니며 도서관에서 각자 원하는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문형의 의도는 명확했다. 레벨 6까지 오른 뒤에 영어가 필요한 회사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삼육 외국어 학원은 실력에 따라 레벨 1에서 레벨 6으로 단계가 나누어진다. 레벨 6은 최종 단계로 영어 대화에서 원어민 강사들을 만족시켜야 획득할 수 있었다. 레벨

6을 획득하면 영어 회화에 관한 한 학원 밖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런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에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레벨 6에 도달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누나를 속이고 모두를 속였듯이 그도 속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책이나 읽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히고 싶다고 말을 했다. 그러고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덜 속였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문형과 함께 할 수 있는 부평 도서관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에 부평 구청 식당의 몫을 빼놓을 수 없다. 부평 도서관 옆에 부평 구청이 자리 잡고 있는데, 나는 그곳의 6층 식당을 매우 좋아했다. 나는 20대 이후로 줄 곳 몇 백 명이 수용 가능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지내 왔다. 대학에서도, 대학원에서도.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런 식당 밥을 사랑했다. 자극적이지 않았고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음식을 바라보는 엄격한 시선에 충실한 곳이었다. 자고로 음식에 설탕이 들어가면 안 되고 조미료가 들어가도 안 된다. 이것이 아버지가 지닌 음식에 대한 신념이었다. 그 신념에 어느 정도 충실한 것이 영양사가 존재하는 대형 식당 밥이었다. 일명 짬밥이라고 불리는 밥이다. 그런데 그런 밥을 부평 구청에서 만나니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게다가 가격도 착하니 금상첨화였다. 우리는 부평 구청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도서관 자판기에서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문형은 도서관 비디오 플레이어로 동영상을 보고, 테이프를 들으며 영어 실력을 쌓았다. 나는 부족한 지식을 채우느라 다양한 책을 읽었다. 그중에 ⌜이념의 속살⌟이라는 책은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리 안의 파시즘 앞에 이상의 무력함을 알게 해 준 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 로딩 문제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지만, 당시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성이 내세운 이상으로 내 안의 파시즘인 무의식을 상대하고 있었다. 나의 이성이 나의 무의식에 그토록 무력한 이유였다. 어떤 사회가 이상을 품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우리 안의 파시즘이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다. 결국, 우리 안의 파시즘을 넘어서지 못하면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다.

  나는 주간지를 읽는 것도 좋아했다. 처음에는 관심 있는 모든 주간지를 독파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러나 점점 더 시간이 줄어들었다. 관심 있는 모든 주간지를 다 읽어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물론 영문판 뉴스위크나 타임지를 읽으면 꽤나 긴 시간을 써야 할 수도 있다. 가끔 한국판으로 나오는 뉴스위크를 보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매번 보다 보니 내용을 다 읽어 내려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도서관에 가면 관심 있는 몇 가지 주간지를 둘러본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시간을 오래 빼앗지 못한다. 한편, 나는 php와 자바를 배워 홈페이지를 만들고 채팅 프로그램도 짰다. 남아도는 시간을 처리할 거리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보험의 성격이 강했다.

  문형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었다. 문형은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H 중공업에 있을 때 입담 좋은 선배의 말을 지겹도록 들었었다. 그러나 듣기만 했을 뿐 내가 스스로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해다. 언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방어 논리를 무수히 개발하고 숙지했지만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 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화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많이 부족했다. 문형은 의외로 입이 무거웠고 말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기회였다. 나는 책으로 배운 지식, 주간지 내용, 그리고 컴퓨터를 통해서 배운 내용을 가지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다. 시간이 흐를수록 말하는 기술이 늘어났다. 그때 입담 좋던 회사 선배한테서 들었던 풍월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서당개 생활 5년을 했으니 문형 앞에서 어떤 풍월이든 나올만했다. 그 풍월이 나와 문형과의 관계를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나는 유창한 입담을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화려한 입담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은 입담가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굳지 최고일 필요도 없었다.

  문형을 만나면서 나는 더 이상 영어 학원에 다닐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나는 레벨 3에서 영어 학원을 그만뒀다. 나의 영어 실력은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반면에 문형의 영어 실력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문형은 외국인 친구를 만나고부터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듯이 늘었다. 문형은 결국 레벨 6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문형은 삼육 외국어 학원 레벨 6 통과자라는 훈장을 가지고 여기저기 회사에 응시했다. 그리고 몇 개의 회사에서 아주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다. 문형의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해방을 꿈도 꾸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친구는 이제 빛의 세계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문형과 헤어져야 할 시간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셋째 누나로부터 최후의 통첩이 날아왔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동생이 MBA를 준비한다고 했는데 5년이 다 되도록 깜깜무소식이니 나에게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듯했다. 거기서 아무런 일도 없이 빈둥거리기만 할 거면 아파트에서 나가라고 했다. 나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하겠다. 다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큰소리를 쳤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거처를 어디로 옮길지부터 정해야 했다. 우선 나는 부천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수원 외곽 쪽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원룸을 몇 군데 찾아냈다. 누나의 16평 아파트는 그 원룸들에 비하면 알람브라 궁전이었다.

  나는 누나한테 한 번 봐주면 안 돼?라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그러나 빈대에게도 낯짝이 있다고 했다. 나는 적어도 한 개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고 그것을 알지만 내가 그런 것을 따질 처지일까? 비축해 둔 돈도 다 떨어져 가고 있는데 주거비로 추가 지출까지 발생할 판이었다. 이런저런 걱정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대학교수로 있는 실험실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의 전화였다. 나는 솔직하게 하는 일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럴 거면 실험실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어요? 후배의 그 한 마디는 나에게 빛이자 광명이었다. 뭐라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교수님이 허락하실 리가 없는데라고 나는 말했다.

  석사 과정 때 내가 교수님에게 저지른 죄질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석사 학위도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지도받지 못했다. 보통 석사 과정 학생은 1학년 때 교과 과정을 이수하고, 2학년 때는 교과 과정을 줄이고 논문 작성에 몰두한다. 그런데 스승의 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이제 학부를 졸업하고 겨우 1학년 교과 과정을 이수한 새파랗게 어린 학생 놈이 교수님이 옳지 않다고 박박 우기고 있었다. 교수님은 적어도 이 나라에서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미국에서 수치해석 시뮬레이션 분야에서 최고라는 명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심기가 불편해하는 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미 박사 제자까지 배출한 사람이었다. 그 앞에서 대학과정을 이제 끝마친 어린 학생 놈이 교수님이 옳지 않다고 박박 우기니 한 성질 하시는 분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나 너 지도 안 해! “      


 교수님은 화를 잔뜩 내고는 케이크를 중심으로 빙 둘러 있던 학생들을 놔둔 채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리셨다. 그런데도 교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나 같았으면 분에 겨워 저 놈은 지가 알아서 졸업을 하든 말든 방치했을 것이다. 교수님은 3년 차 박사과정 선배를 불러 나를 지도하라고 하셨다. 왜 그러셨는지 나중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H 중공업에서 세상 풍파를 헤치며 여러 가지 경험을 쌓은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교수님은 겉으로 보기에 정말 강하지만 사실 내면으로는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교수님의 속내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박사 3년 차 선배의 지도를 충실히 따랐다. 논문 주제는 처음 교수님이 지도한 것과 다르게 모든 것이 명확했다. 교수님이 논문 주제로 정해준 첫 번째 문제는 접근자에 따라서 매우 까다로울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접근자 중 하나에 해당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인지 새로운 논문 주제는 이론적으로 접근이 명확한 문제였다. 나는 선배가 지시한 내용을 일주일이 지나면 끝내 놓았다. 다음 단계도 일주일이면 마무리를 지었다. 선배는 내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 듯했다. 고생 좀 할 것을 기대했는데 나는 전혀 고생하지 않고 있었다. 선배의 지도하에 나는 2개월 만에 논문 작성이 가능한 수준의 결과를 만들어 다.

  그런 중대한 범죄의 경험이 있으니 교수님이 나를 받아 줄 것이라고 쉽게 예단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후배는 내가 회사에 있을 때 실험실로 보낸 4,000만 원짜리 프로젝트에 대해서 교수님 크게 만족해하셨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동안 제자들을 여럿 내보냈는데 그중에 내가 처음으로 프로젝트를 물고 온 것에 대해서 나를 좋게 보신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사실이야 그랬다. 그러자 사실이라고 했다. 나를 위안시키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후배는 교수님에게 말씀을 드려보겠다고 했다. 나는 교수님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 내심 걱정했다. 어디 갈 데도 없고 그렇다고 회사에 들어갈 수도 없고,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다행히 교수님은 나를 박사과정으로 받아들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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