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대학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H 중공업이다. 나는 첫 직장인 H 중공업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았다. 로딩 문제에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세상 사는 노하우를 다양하게 읽혔다. 새 영혼의 혜안이 갖추어야 할 능력이었다. 애초에 나의 목표는 이보다 훨씬 원대했다. 로딩 문제를 해결하고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울산에 내려갔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성급한 기대일 뿐이었다.
대학원 석사 동기들의 마지노선은 대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과 게시판에 올라온 H 중공업의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마음을 먹었다.
”여기에 가야겠군! “
어차피 오래 머물 회사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만이었다. 나의 작업에는 소음과 잡음이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저 아래 남쪽에서 소란을 좀 피운 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나는 울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첫 번째 행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구소에 대학원 선배가 있었는데 33세에 부장급의 실장을 맞고 있었다. 그는 내가 회사 생활을 하는 고비 때마다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나는 분위기 파악을 하느라 그리고 주요 업무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6개월을 보냈다. 그런데 6개월 뒤에 우연찮게 주 업무를 찾게 되었다. 수치해석이라는 시뮬레이션 업무였다. 시뮬레이션은 컴퓨터를 이용해서 비행기나 터빈 등의 각종 장비나 설비의 유동을 계산해 낸다. 계산을 통해서 장치나 설비의 설계가 가능하다. 처음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도입되었을 때 내 담당이 아니었다. 그런데 담당 예정자는 시큰둥했고 나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주로 그 프로그램을 돌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업무가 나에게로 왔다. 그것이 두 번째 행운이었다. 나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나만의 업무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거의 전담하다시피 그 일을 맡았다. 모든 시뮬레이션 작업은 내 손을 거쳤다. 그리고 나의 시뮬레이션이 엉터리가 아니라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나의 입지는 굳어졌다. 현장에서 유동 장치를 설계해 달라는 실험 용역이 올라왔다. 나는 담당 팀 소속이 아니었지만 그 장치를 시뮬레이션으로 설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실험 전에 시뮬레이션으로 초기 설계를 하자는 아이디어였는데 아마 실장의 의견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원래 시뮬레이션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실험 전에 다양한 조건으로 시뮬레이션을 수행하여 최종 설계에 근접한 초기 설계안을 도출해 내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가 있다. 고가의 가스 터빈을 제작하는 업체에게 시뮬레이션은 필수이다.
실장의 아이디어이니 담당 팀의 팀장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추측일 뿐이다. 어찌 되었든 나한테 유동 장치를 설계하라는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나는 그 설계안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컴퓨터를 이용한 이 작업이 엉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어떻게 실제 상황하고 같겠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부수고 싶었다. 나는 우선 복잡한 내부 유동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설계를 시도했다. 내부 유동이 복잡해지면 시뮬레이션의 정확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의도는 적중했다. 어느 날 담당 팀의 팀장이 나한테 다가와서는 나를 추켜 세웠다.
”한 박사!”
내가 설계한 안과 그 팀이 자체적으로 설계한 안을 테스트했는데 나의 설계안이 가장 나았다. 나는 그 팀의 설계안으로 시뮬레이션을 수행해 보았다. 설계가 잘못되어 있었다.
얼마 후, 실장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나 들고 왔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가진 기본 기능으로는 불가능하고 입력 파일을 조작해야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 정말 많을 시간을 사용해야만 했다. 프로그램의 모든 기능을 일일이 들여다보아야 했고, 입력 파일을 조작하기 위해서 별도의 Fortran 프로그램도 작성해야 했다. 나는 그 프로젝트를 통해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의 기능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두 프로젝트를 거치면서 나의 프로그램 사용 능력은 회사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수준에 도달했다.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나는 더 이상의 기술적인 진전을 시도하지 않았다.
두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고 나자 나의 시뮬레이션 작업에 대한 입지는 단단히 굳혀졌다. 업무 특성상 기술적 진전을 시도하지 않으면 시간이 남아돌았기 때문에 여유 시간도 넉넉하게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울산에 내려온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밑천을 챙길 수 있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 보자!”
그러나 여기서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는 곧 벽에 부닥쳤다. 거의 진전이 없었다. 로딩 문제의 해결책은 실마리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두 눈이 가려진 채로 망망대해를 마냥 헤매는 기분이 들 만큼 막막했다. 여전히 오름의 고통을 떨쳐 버릴 수 없었고 가슴 답답함도 그 후에 찾아오는 정신적인 충격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조울증 환자처럼 격한 감정의 기복에 시달려야 했다. 오름에 오른 뒤에 깊은 상심이 찾아왔고 나의 심적 상태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한 와중에 나는 다른 부분에서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는 나를 고조시켰다. 그렇게 고조되었다가 로딩 문제가 발생하면 나는 바닥으로 다시 내동댕이 쳐졌다. 나는 그렇게 조울증 환자의 증상을 전전했다.
나를 고조시킨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확대될 때마다 느끼는 희열이었다. 책으로 쓰이지 않은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 그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역학 관계를 풀어나가는 지혜를 얻을 때 나는 엄청난 환희를 느꼈다. 나는 H 중공업에서 반드시 키워야 할 것이 바로 혜안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리 쉽게 로딩 문제에서 해방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어슴푸레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젠가 로딩 문제에서 해방되는 광명의 날이 찾아왔을 때 지혜의 눈을 이미 장착하고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평지풍파를 일으켜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러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나는 점차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에서 의견이 충돌할 기회는 널려있고 나는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충돌 속에서 금쪽같은 파편들이 튕겨져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충돌은 늘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너무 쉽게 무너져버리면 우스운 모양새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적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자면 언어적 대응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언쟁이 벌어졌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방어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머릿속으로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수행했다. 상대의 다양한 언어 공격에 대해서 다양한 대응 논리를 개발해 나갔다. 수차례에 걸친 상대방의 공격에도 꿋꿋이 버텨 낼 수 있도록 상황별 대응멘트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숙지하기 위해서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나는 쓸만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싸움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그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 나의 의도를 팀장들도 이내 알아차렸다. 어느 순간 팀장 누구도 나를 팀원으로 받아들이기 꺼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어느 날 7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의 자리는 변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팀 소속이 바뀌어 있었다. 열유체 팀에 속해 있었는데 엔진 팀으로 소속이 변경되어 있었다. 아무도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는데 엔진 팀에 새로운 팀장이 오면서 나를 받아준 것이었다. 그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박사학위 소지자로 무시 못할 사람이었지만 그런 사람들이 쉽게 무시당하는 곳이 바로 우리 사회다. 그는 미국이 어떻게 돈을 벌고 어디에 돈이 몰리고 있는지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엔진 따위가 아니라 C++ 같은 프로그램이라고 설파했는데, 30년 전 H 중공업의 엔진 연구실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였다.
팀장은 회사원의 처지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들의 주 업무는 엔진 개발이다. C++이나 배우겠다고 말하면 회사는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엔진 개발에 정신이 없는데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는 C++을 배우라니 이 무슨 소리입니까? 소리를 팀장은 들어야 했다. 나도 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C++ 책의 내용을 파악하려 약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좀 더 내용을 깊이 파악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그 이전부터 나는 컴퓨터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생각이 있었다. 왜냐하면 처음 리셋 버튼을 누를 때 계획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서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처음으로 구매한 것이 현주 컴퓨터의 PC였다. 나는 ⌜IBM PC의 내부⌟라는 책을 읽으면서 turbo C로 구매 정리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만약 내가 그 길을 계속 깊이 있게 파고들었더라면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윈도 안에 네트워크 게임이 추가되자, 이거 사람들이 좋아하겠는데, 이것 만들면 돈이 좀 되겠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생각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로딩 문제였다. 나는 로딩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벌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C++에 약간의 관심이 있었지만 동료들은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팀장을 비웃었다. 나는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비난하고 비웃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들과 거리를 유지했다. 나는 동료들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 팀에서 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결국, 팀장과 그들은 함께여야 했다. 그런데 7명이 똘똘 뭉쳐서 팀장을 공격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팀장은 냉혹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해 내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좋은 대학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의 꼬임에 넘어가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었다. 실속도 없는 연구소에서 찌그락 째그락 하느니 빨리 현실을 직시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최상의 선택으로 보였다.
팀장에 대한 팀원들의 생각은 처음에는 미미한 반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반감은 점점 더 싹을 키웠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임계점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아무리 팀장이라 하더라도 팀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팀장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소장은 그를 경기도의 중앙 연구소로 보냈고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서울의 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왜 얻을 것도 없는 사지에서 재능을 썩히고 있단 말인가? 탈출이 최선이었다. 그는 양반 같은 사람이었다. 풍채도 좋고 성격도 좋았고, 회사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텃새를 감당해 내지는 못했다. 아마 미국에서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엔진 팀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는 맹탕 같은 팀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곧 원하는 열유체 팀으로 복귀했다. 아마도 실장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그곳에 내 인생을 통해 만난 사람 중에 최고의 입 담꾼 선배가 있었고 최고의 행정가를 자처하는 팀장도 있었다. 그곳에 젓과 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다투고 논쟁하며 수많은 노하우를 익혔다. 나는 열유체팀장을 통해서 행정의 원리를 깨우쳤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행정에 대해서 좀 안다고 자신 있게 말을 하곤 한다. 그들은 나에게 좋은 스승이었다. 그들은 절대 악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계속해서 도발을 했다. 그 도발이 어느 날인가 나를 바닥으로 내몰기도 했다. 어느 날 열유체팀장은 노래방에서 기세가 등등했다.
”상헌 씨 지금 외통수에 걸린 거야! “
그때 나는 노래방 소음을 뚫고 그에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호기롭게 말은 했지만 궁지에서 탈출할 뚜렷한 해결책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오래지 않아 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특별히 어떤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상황이 변하기를 기대하며 인내했다. 나는 그 사건으로 위기에서의 인내를 배웠다. 위기에 흔들리지 않으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이 알아서 구제해 준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이후로 팀장은 의기소침해졌지만 그가 기뻐할 이벤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날을 위해서 1년 전부터 두 명의 인수 인계자를 이미 키우고 있었다. 1년 전 나는 내가 속한 산업기계 연구실과 환경 연구실에서 각각 한 명씩을 골라 시뮬레이션을 가르쳤다. 둘이 소속된 팀의 팀장들은 나의 제안에 격하게 동의했다. 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쳤지만 너무 자세히 가르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1년이라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 동안 스스로 배우는 것이 최선이었다. 뼈와 살은 그리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험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스로 터득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문턱에서 막히면 내가 혈을 뚫듯이 작업해 줄 필요는 있었다. 둘 다 스스로 배우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뒷방으로 물러나 독차지하고 있었던 워크스테이션을 둘에게 양보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있었다.
결단의 시간이 다가올 즈음 IMF가 터졌다. 다들 직장에서 버려질까 고민하던 시기가 도래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결심을 번복시킬 수는 없었다. 어느 날짜에 말을 꺼낼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가 퇴사를 하겠다고 팀장에게 말을 건넸을 때 그는 전혀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환경 연구실 실장이 나를 불렀다. 내가 속한 산업기계 연구실 실장은 그러니까 선배는 미국에 연가 중이었기 때문에 환경 연구실 실장이 산업기계 연구실 실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퇴사 소리가 나오면 보통 상사는 고민하고 어느 정도 묶여 두었다가 위에 보고할 텐데 팀장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실장에게 보고해 버렸다. 나는 실장에게 MBA에 가겠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실장은 고민을 한 번 더 해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조언을 해 주었다. 나는 알았다고 했다. 문제는 미국에 가 있는 선배였다. 환경 연구실 실장은 미국의 선배에게 연락했고 선배는 즉각적으로 나에게 메일을 보냈다. 본인이 귀국할 때까지 결정을 보류하고 그 이후에 결정하자는 말이 담겨 있었다.
사실 나는 선배가 미국에 있을 때를 최적 시점으로 잡고 있었다. 나의 결심은 확고했기 때문에 어차피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선배가 미국에 있을 때가 최적기였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소기의 목적을 다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든든한 선배라는 뒷배를 보유한 행운이 가장 컸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내가 든든한 선배라는 뒷배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막무가내로 반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선배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나는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 울산에 내려온 의도를 고려하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든든한 선배의 존재는 반기를 드는데 아주 편안함을 안겨 주었다. 그는 그 시기의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었다. 게다가 예상보다 좋은 상대를 만났고, 그들은 전혀 악하지 않았다. 아마 더 악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전투는 더욱 치열했고 나도 상처를 많이 받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미안한 마음은 적었을 터였다. 나는 그들과 상대를 하면서도 미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훈련 상대로 그들을 이용하면서 그들의 삶에 어느 정도 상처를 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에 내가 떠나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최선이었다. 내가 짐을 들고 퇴사를 하는 날 열유체팀장은 싱글벙글이었다. 짐까지 들어주면 꼭 성공하라는 덕담까지 건넸다.
결국, 나는 바라던 영혼의 일부 모습만을 엿본 채 H 중공업에서 떠나오고 말았다. 조울증적 상태는 순화되어 가고 있었지만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로딩 문제 해결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