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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리향 Oct 08. 2024

연구 교수, 두 번째 숙제의 향방

  연구 교수 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로딩 문제 측면에서 홍릉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 사무실 공간에 여러 명의 연구 교수들이 같이 근무했지만 공간은 넓었고, 나는 자유롭게 사무실을 이탈할 수 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던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홍릉과 다른 점이었다. 대학원은 내게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다. 어디에서 쉴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날지 나는 알았다. 그것은 나에게 마음의 안정을 안겨주었다. 나는 홍릉에서와 같은 강도 높은 로딩 문제 2 상황을 아직 감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연구교수의 주 업무인 논문 작성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 영양가가 있는 논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제법 많은 논문을 썼다. 나는 논문 발표를 위해서 해외 학회에도 자주 나갔다. 그것은 두 번째 숙제를 해결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진다는 측면에서 작품을 조각하는 데도 일정 부분 기여를 했다. 학회 참석 도중에 여유 시간을 활용해서 책이나 다큐멘터리로 배운 역사적 진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역사에 대한 시각을 강화시켜 주었다. 런던 박물관에서 센나케리브의 벽화를 보고 안 보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화면으로 보는 것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하고는 천지 차이였다. 나는 아직도 첫 해외 학회 출장지인 안탈리아의 작고 아름다운 구역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칼레이치. 이 어려운 이름을 내가 책으로 그리고 화면으로 읽혔더라면 금방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나의 머릿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책으로 기억하는 역사와 실재 눈으로 만져 보는 역사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나는 해외 학술 발표에 나가면서 여러 도시를 방문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피렌체였다. 로마에서 학회를 마치고 나는 이틀 짬을 내서 피렌체를 잠시 방문했다. 그 이후로 자비를 들여 두 번이나 더 그 도시를 방문했다. 나는 이유 없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그런 낭만적인 녀석이 절대 아니다. 피렌체를 좋아한 이유는 르네상스의 발생지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는 근대에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양 패권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어떻게 르네상스가 태동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로마보다는 피렌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 런던에는 식민지에서 착취한 부로 자랑하듯 만든 빌딩들이 즐비하지만 나는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아르노 강가에 서면, 미켈란젤로 광장에 서면, 특히 피렌체 델 피오레 성당 앞에 서면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두 번째 숙제를 풀기 위해서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시대적으로는 르네상스가 가장 적절한 시점이었다. 그리스나 로마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물론 르네상스를 알려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나는 이 숙제를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풀어내고 싶었다. 로딩 문제가 지속되는 그날까지 내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 숙제를 풀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다.   

   

     “이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어떻게 수많은 천재들이 튀어나왔을까?”     


 나는 이 질문의 대답을 찾기 위해서 피렌체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우선 천재들이 남긴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다비드상을 보았을 때 나는 천재의 먹먹함이 느껴졌다. 라파엘로와 보티첼리의 그림 앞에서 서양 그림의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다. 한 두세 대 만에 화에서 재발견을 넘어선 혁명적인 변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피렌체의 새벽마다 아르노 강변을 산책했다. 아르노강은 그리 인상적인 규모의 강은 아니지만 피렌체의 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정감이  갔다. 피렌체는 나에게 그런 도시다.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시뇨리아 광장도 새벽에 둘러보면 한산해서 좋았다. 넵튠의 분수들,  란치로지아에 즐비한 여러 조각상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낮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한산함 속에 몇 번 배회하는 것으로 답이 알아서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면 도둑놈 심보일까? 피렌체 성당의 꼭대기로 가는 좁다란 계단을 오르면서도 나는 답을 찾으려 분주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성당의  꼭대기에 두 번 올랐는데 처음 올랐을 때는 비가 약간 내렸다. 그래서인지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인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나는 벽돌 위에 휴지를 깔고 앉아 한참이나 주변을 독차지했다.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놀라운 건물은 앞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사람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성당은 도시의 상징이 되고도 남을 만큼 자격이 충분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나는 끝내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내 안의 깊은 곳 어딘가에선 대답으로 늠름하게 성장할 생각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구 교수 생활은 이렇듯 나에게 커다란 활력을 안겨 주었지만 나를 침울하게 만드는 사건도 마주치게 했다. 신임 총장이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학교는 커다란 소동에 휘말렸다. 학생들이 죽어 나갔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펴서 야외 음악당을 감싸고 있던 어느 봄날. 학생 하나가 또 자살했다. 2011년에 일어난 네 번째 자살이었다. 학생들을 향한 신임 총장의 강경 드라이브에 학생들이 풀잎처럼 쓰러져 갔다. 결코 반길 수 없는 소란 속에서 나는 다시 나에게 질문을 덜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일에 대해서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이는 내가 늘 아쉬워하는 부분이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답을 찾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덜할 것이다. 어떤 문제이건 상의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아쉬움은 항상 나의 몫이었다. 그러면 어쩔 수가 없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니? 신문의 기사는 총장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학칙이 가혹했다고 총장은 질타를 받았다. 그에 대해서 총장은 대한민국 최고 대학원 학생들이라면 그 정도 압박은 이겨내야 한다고 말을 했다. 전에 재직했었던 미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은 더한 압박을 견뎌낸다는 사실로 총장은 자신의 말을 합리화했다. 총장은 학생들이 미국의 학생들하고 다르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학칙도 정책과 같아서 주어진 환경을 무시하면 안 된다. 어떤 정책도 모든 환경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말을 끌고 갈 때 말에 따라서 너무 세게 끌면 줄이 끊어지거나 말이 상해를 입는다. 총장은 처벌이 주는 고통이 학생들에게 보약처럼 작용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약이 지닌 본연의 독성조차 학생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처벌은 너무 강했으며 갑작스러웠고 일부 학생들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방금 죽음의 질주를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너무 지쳐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질문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학생과 총장이 전부는 아니다. 분명 총장의 현실 이해도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학생들이 힘든 시간을 지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질문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대학 이전에 학생들을 힘든 시간으로 내몰았던 그 누군가도 질문을 받아야 마땅하다. 학생들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곁에서 학생들을 채찍질하고 회유했던 학부모도 질문을 받아야 한다. 학부모들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우리 사회가 가장 강도 높은 질문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우리 사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왜 더 많은 희생하고 덜 누리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풀어야 하는 두 번째 숙제의 명제이기도 했다. 일련의 사태는 이  두 번째 숙제의 명제에 대한 대답을 찾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렌체를 다녀온 뒤로 오래지 않아  어떤 개념 하나가 어렴풋하게  떠 올랐고 나는 그 개념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두 번째 숙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 정리 작업을 마무리하는 데는 8년이라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학생들의 죽음은 겉으로는 총장과의 갈등이 원인이었지만 그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우리 사회가 지닌 독성이 그 밑에 똬리를 틀고 있다. 처음 이 사태를 마주했을 때 나는 내가 풀려는 두 번째 숙제하고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둘은 강한 연관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죽음의  원인을 쫓다 보면 우리 사회의 내면이 품고 있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나는 로딩 문제를 단순히 탑의 상부에서 벌어지는  문제로 접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는 하부로 내려가야 했고 그 뿌리가 너무 깊어 정말 해결할 수 있을지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는 두 번째 숙제에 대한 해답에 근접할수록 그와 똑같은 두려움에 휩싸여야 했다.


  두 가지 숙제를 어느 정도 마무리 지을 때까지 나는 연구 교수 생활을 하고 싶었다. 적어도 두 번째 숙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상은 또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총장은 쫓겨나듯이 미국으로 되돌아갔고 총장의 흔적을 지우려는 작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신생과는 통폐합되거나 다른 과에 흡수되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과는 기계공학과에 흡수되었다. 과에서 소속되어 있던 다수의 연구 교수도 정리 절차에 들어갔다. 물론 나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아 대학원아! 다시 안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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