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사업을 하겠다고 선포한 남편은 당장이라도 사무실을 차릴 기세로 세모 모양의 작은 토지를 매입한다. 비어있는 땅 위에서 야채를 파는 할아버지는 매일 막걸리를 마시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비가 붙는다. 경찰서에서는 민원 처리의 고충을 하소연한다.
어린 시절 많은 꿈을 꾸었다. 세상을 아름다운 색으로 채우는 화가가 되고 싶었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기도 했고,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세계에 나를 데려다 놓는 소설가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어려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빠르게 포기해버렸다. 그만큼의 열정이 없었든지 근성이 없었든지 간에 예술을 업으로 할 만큼 잘하는 사람은 되지 못했어도 즐기는 사람은 되었다. 그 사랑의 마음만으로도 내 세계는 훨씬 풍요롭고 아름답다.
누구도 나에게 꿈꾸기를 강요하지 않아서 나는 자유롭게 꿈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10대의 어린것들에게까지 꿈을 강요하는 사회가 불편하다. 꿈꾸지 않는 사람이 루저가 되고 인생에서 뒤처지다 결국 낙오될거라는 불안심리를 주입하는 사회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꿈을 꿔주지. 이번엔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볼게. 그럼 나 도와주는거지?' 땅을 매입한 것은 남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사업의 꿈. 사업가로 성장해서 유니콘이 되어 훨훨 날아가는 꿈. 그러나 그 꿈을 세상은 응원했을까?
경찰서 연락이 뜸해지고, 남편의 사업 욕구도 점점 줄어들고 있던 어느 날.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일요일 오후였다.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요즘 우리 가족에게 가장 큰 행복을 전해주는 가게가 집 앞에 생겼다고 해서 들러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이스크림 할인점! 하드 하나씩 입에 물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눈을 돌렸는데 우편함에 커다란 봉투 하나가 특 튀어나와 있다.
'저건 뭐지?'
평소 지하주차장과 집을 오가느라 며칠치의 우편물이 쌓여가지만 여태껏 저러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주차단속 과태료, 세금과 관리비 고지서, 카드 청구서 등 각종 돈내라는 것들가는 달랐다. 정체 모를 각봉투를 꺼내어들었다.
"뭐야?"
"화성시청인데?"
두툼하게 들어있는 내용물이 무엇일지 예측할 수 없는 의문의 봉투. 열어보니 공문 몇 장과 이의신청서가 들어있었다. 처음 들어본 생경한 단어들로 싼 값에 생성된 도파민의 버블이 가라앉고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토. 지. 수. 용.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토지강제수용'이라 했다.
토지강제수용이란 공익사업의 시행자가 법률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토지의 소유자의 의사에 불구하고 필요한 토지의 소유권을 강제적으로 취득하게 하는 제도를 말함.
※ 관련법률 :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요약하자면 이런 거였다.
너 얼마 전에 땅 샀지? 버스정류장에서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거.
그런데 그거 왜 방치하니?
너무 지저분해서 미관상 좋지도 않고 거기서 맨날 할아버지들 술 취해서 싸움 나잖아. 민원이 많아서 우리는 골치가 아파. 고민하다가 거기에 공원을 만들기로 결정했어. 그럼 시민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니? 이건 공익 목적이라는 것을 기억해 둬!.
공.익.
그런데 혹시 할 말 있니? 일주일 기한은 줄테니 그때까지 꼭 해야 해. 기한 안 지키면 얄짤없다.
공원조성은 공익을 위한 것이니까 우리 의사와 관련 없이 강제로 가져가겠다는 거다. 아! 물론 적법한 절차를 거쳐 보상은 해 준다. 공시지가로. 그런데 보통 매매 가격은 공시지가보다 높아서 이대로 수용되어 버리면 무조건 손해를 봐야 한다.
‘똬...........앗’.
'뭐? 내일?‘
‘결. 정.? 도대체 뭘 결정했다는 거지? 우린 아직 아무 생각이 없는데’
하지만 우리는 다음날까지 할 수 있는 조치를 해야했다.
아. 무. 튼.
'별거 아니겠지'하고 토지강제수용이라는 사유재산을 공유화하겠다는 이상한 제도를 찾아보았으니 결론은 '수용을 막기는 어렵다'였다. ‘그냥 포기해라.’, ‘이의신청을 해도 별 수 없을 거다.’ 이런 부정적인 내용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간간이 그런 불가능에 1%의 가능성을 보고 도와주겠다는 의지를 가진 각종 변호사 사무실의 전화번호가 숨어 있었다. 별거 아닐거라는 확신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토지수용은 더 이상 귀찮은 민원을 처리하지 않기 위해 시에서 생각해 낸 묘수였다. 우편물이 우편물함에서 꽤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나 보다. 아니면 이의신청을 못하게 후루룩 끝내버릴 심산으로 기간을 아주 짧게 주었거나. 시에서 정해준 이의신청 마감기한은 딱 하루를 남기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이대로 눈 감고 코베어가도록 두고 볼 수는 없다.’
개인에게 손해를 입히고 땅을 시에서 강제로 사갈 수 있다느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애초에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입한 곳이기 했지만 '땅이 도망가겠냐.‘라는 생각으로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사업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우리 이제 어떻하지?”
“할 수 있는 것은 해 봐야지. 우선 이의신청서를 써서 내일 가지고 가자.”
그렇게 우리는 밤을 새워 눈물 젖은 이의신청서 쓰기에 돌입한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저희 가요. 애가 셋인데요. 유치원생 하나에 초등생이 둘이에요. 이건 키워본 사람만 알아요. 하나도 힘들다 하는데 셋이라니.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경제적 부담도 크더라구요. 5인 가족 생활비가 만만치 않아요.
그런데요. 얼마전에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서 짤렸어요. (감정에 호소할 방법을 찾다 보니 그것은 실직밖에 없었다. 굳이 확인하지는 않겠지?)
너무 막막해서 뭐라도 해보려고 빚을 있는 대로 땡겨서 여기다 땅을 샀어요. 우리는 이곳에서 미래를 꿈꿔요. 세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지요. (이거 좀 먹힐 거 같은데? 누구도 행복한 미래를 빼앗을 권리는 없잖아)
이거 수용되면 우리 다섯 식구는 길가에 나앉아야 할지도 몰라요. 빚을 값아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수용 안 하면 안 되나요? 제발요. 제발 흐엉 흐엉~ (이정도면 세상 불쌍해 보이려나?)
선량한 시민의 소박한 꿈. 우리 가족이 꿈꾸며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 (꿈에의 호소!로 마무리)
꿈꾸라며! 그래서 꿈을 꿨으니. 꿈을 짎밟는 일은 하지 않겠지? 하는 단순한 논리였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이의신청서를 들고 시청으로 달려갔다. 마감일을 이의신청 마감일이니 서류를 들고 직접 갈 수밖에..월차 하나를 날렸다.
담당자를 찾아 자초지종을 들었으나 그가 우리에게 조용히 내민 것은 토지사용계획조감도였다. 이미 모든 계획은 끝이 나 있었다. 배신감. 이의신청은 적법한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명목상 끼워넣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명.목,상..
사람들의 휴식공간을 만든다고 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30평 정도 매우 작은 면적이었으니 고작 나무 몇 그루 심고 벤치 두 개를 놓는 게 전부였다. 배신감과 절망감은 '나는 이 수용을 꼭 막고 말겠어!' 하는 의지에 불을 질렀다.
우리의 감정 따위는 공감할 생각이 없고, 호소를 들어줄 시간도 없다는 듯한 공무원은 적당히 친절한 말투로 '이의신청서 내고 가세요.'라고 말했고, 타오로는 분노를 감출길 없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눼에~'
'꿈꾸라며, 그래서 꿈꿨더니, 이제 꿈을 접으라구?' 마음 속의 울부짖음을 들었을리 없는 공무원들을 뒤로하고 이의신청서를 제출하고 돌아서던 날,
8월 여름의 끝자락임에도 나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 손을 떠났다.
잠시 우리 것이었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대로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것은 잠시의 설렘을 주고 떠난 신기루였던 것일까?
신기루 : 홀연히 나타나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되다가 사라지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일이나 현상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