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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정원에서 삶을 읽다.

by 리인

일하고 글을 쓰면서도 가족과 삶을 나누는 시간은 꼭 가지고 싶었다.

출간 막바지 수정 작업을 하던 중에 군대 간 아들을 제외한 가족 셋이 오랜만에 시간의 정거장에서 만났다.

각자 시간의 선을 따라 살던 우리는 포개진 시간의 선 위에서 서로를 반가워했다.


딸이 성인이 되면서 마음에서 독립시키고 나니, 엄마와 더 자주 일상을 나눈다.

이틀에 한 번 통화를 하는 엄마와는 모르는 일상없이 공유하지만, 딸과는 가끔 안부를 나눌 뿐이다.


나와 얼굴을 마주한 딸은 그제야 지내온 시간들을 깨알같이 쏟아놓기 시작한다. 그래서 딸이 집에 오는 날이면 내 손은 책과 노트북에서 잠깐 멀어진다.

셋이서 함께 간 시골마을에는 제법 큰 카페가 있었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서 나무의 푸른 숨결과 함께 다양한 연령의 가족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원 한가운데로 백발의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할머니는 정원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고, 딸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의자 뒤에 섰다.


할머니 뒤에 서 있던 여성은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려 팔을 움직이는 듯하더니, 이내 팔을 내려 할머니 얼굴에 꽃받침을 만들었다.


여성이 손을 뻗어 만든 꽃받침은 할머니를 소중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만들었다.

챗 gpt가 손으로 꽃받침은 정확히 못 만드네요.


어느새 초록 정원의 할머니와 여성은 엄마와 나로 바뀌어 보였다.

맥락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도 꽃으로 빛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소리 없이 꽃을 지켜주는 꽃받침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내면으로 끝없이 스며들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딸과 남편이 이야기의 여백을 채우려고 나를 쳐다보다 눈이 동그래졌다.


“나 저 장면을 보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남편과 딸도 사진을 찍고 있던 할머니와 여성을 바라본다.


“엄마도 외할머니 모시고 이런 카페 한번 와야겠다.”

딸이 내 마음을 읽어 주었다. 눈물을 닦고 있는 내게 딸이 다시 말했다.

“나중에 엄마 늙으면, 나도 엄마 데리고 이런데 올게요.”


딸은 내 눈물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엄마가 아프고 나서야 엄마를 공기 같은 당연한 존재가 아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소중한 존재로 만났다.

엄마는 말괄량이 삐삐처럼 유쾌한 사람이었고,

웃길 의도가 없는데 우리를 웃게 하는 사람이었다.


영혼 속에 숨어있는 명랑함을 찾은 엄마가 반갑다.

옛날, 엄마가 내게 전화해 울었을 때 나는 엄마에게 이런 명랑함이 있을거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어쩌면 원래 엄마가 지니고 있던 명랑함을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긴 시간 흘렸던 엄마의 눈물 덕분에 엄마의 명랑함은 아침 이슬에 씻긴 초록 이파리처럼 생긋해졌다.

엄마는 이제 매일 유쾌하고 푸른 미래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며칠 전 엄마가 내게 말했다.


"우리 딸, 자주 전화해줘서 고마워.

엄마는 네 전화받으면 활력이 생긴다."


엄마와 아버지가 겪은 수많은 시간들 속에서, 그것을 지켜 본 나의 시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흐릿하게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오늘 엄마와의 통화에서 꽃받침 이야기를 했다.


"엄마, 추석 때 내려가면 다 같이 카페 가서 사진 찍어요.

내가 엄마 얼굴에 꽃받침 만들어 드릴게요."


노모와 딸의 사진 찍는 장면을 보며 삶을 읽고,

삶의 푸른 정원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곳에 나의 고향이자 대지인 엄마가 있다.


당신은 그저 배우는 독자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견자가 되고 싶은가?

견자가 되려면 당신의 운명을 읽고,

당신 앞에 놓인 것을 보고,

미래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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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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