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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행복을 인화하다.

푸른 정원에서 삶을 읽다 2

by 리인

더 이상 엄마의 장어국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추석, 가족 식사를 위해 장어국이 맛있다는 집을 예약하면서, 추억을 잘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마음이 부풀었다.


식당은 부모님 집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거제행 여객선이 들고 나는 바닷가 근처다. 학창 시절 내가 타는 모든 버스의 양쪽 차고지는 바다였다. 우리 집 근처 바다는 5분, 반대쪽 바다는 30분.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은 소홀히 하고, 멀리 있는 것은 소중히 여기기 마련이었다. 그때는 지천에 널린 바다를 두고 몇 걸음이면 끝이 보이는 좁은 시내에서만 놀았다. 지금은, 어린 시절 파란 물결로 넘실대고 하얀 파도로 해안가를 감싸던 바다를 만나려면 족히 3시간은 넘게 달려야 한다.


20대의 딸과 70대의 엄마, 80대의 아버지 그리고, 50대의 남편이 장어구이 식당의 화로 주변에 둘러앉았다.

항구 근처에 하나뿐인 장어구이 집은 테이블이 5개 정도로 아담했고 60대 여사장님은 혼자 분주했다.

"장어국도 5개 주세요. 장어국이 먹고 싶었거든요."

엄마도 반갑게 거들었다.

"나도 요새 장어국이 먹고 싶었다."

사장님이 바삐 움직이는데도 주문한 장어국은 한참 뒤에 나왔다.


장어구이는 먹다 말다 하던 엄마가 장어국은 맛있다고 몇 번이나 감탄하며 뚝배기를 금세 비우셨다.

엄마는 양념되어 구워져 나온 장어는 손도 못 대셨다. 장어국 한 그릇, 추억의 포만감이 엄마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처럼 만족해하셨다.

"아이고 마, 진짜 잘 먹었다. 사장님이 장어국을 참 잘 끓이네."


뚝배기 속의 장어국은 엄마의 것과 완벽히 똑같진 않았다. 아니, 똑같을 순 없었다.

엄마의 장어국을 먹을 때 아이들은 어렸고 나는 젊었으며, 엄마는 기력이 좋았다. 장어를 따로 삶아 통통한 살이 뭉텅뭉텅 들어간 엄마의 장어국은 실했고 진했다. 자식과 사위, 손주에게 먹일 음식을 하기 위해 엄마는 새벽부터 어시장에서 장어를 샀다. 장어를 따로 삶아 장어국을 끓이고, 갈비를 재고 잡채를 하셨다.


우리 아들이 대학생이 된 어느 날 말했다.

"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외할머니가 해주신 음식이에요. 살면서 그것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나도 그랬다. 친정에 내려갈 때마다 엄마가 해주던 음식은 영혼의 밥이었다. 내 영혼은 엄마 밥을 먹고 통통하게 살이 쪘고, 엄마 국을 먹고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때는 귀한지도 몰랐던 순간이 가끔 삶을 관통해 내게로 와서 추억으로 혼자 무성해질 때가 있다. 마음의 표면이 거칠어질 때, 마음의 온도가 차가워질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 뜨끈한 장어국을 들이키고 있었다.


엄마에게 장어국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엄마가 살아낸 세월로 되돌아가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이제 장어국을 만들 수 없어도, 생을 살아내는 것만으로 나의 충만함이 되셨다.

그런대로 건강하셔서. 종종 행복해하셔서.


이번 추석에는 할 일이 있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 정원에서 엄마에게 꽃받침 해주며 사진 찍기!

지난여름, 가족과 함께 찾았던 카페의 정원에서 꽃받침 해주며 사진 찍는 모녀를 보고 엄마에게 해주리라 다짐했었다.


푸른 정원에서 삶을 읽다. (이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어버이날 엄마랑 셋이 갔던 카페가 너무 좋았다고 또 가자고 하셨다. 추억으로 만든 차를 마시러 전에 갔던 카페를 찾았다. 추석 오후 카페는 가족 손님들로 가득 차, 우리를 위한 테이블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세심한 신은 내가 미션을 수행하는데 최적의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돌아가는 길로 안내했다.


카페를 나와 바닷가 선착장 근처의 다른 카페로 갔다. 자주 볼 수 없는 손녀딸을 만난 엄마, 아빠는 푸른 하늘에 뜬 낮달을 보는 것처럼 애틋함과 특별함을 담은 눈빛과 말빛을 딸에게 건네셨다.


나는 이제 시간의 놀라운 속도와 무심함에 경솔해지지 않으려 한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둘러앉은 가족의 대화와 눈빛, 미소 한 줄기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카페의 뒷문으로 연결된 선착장으로 산책을 나갔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엄마의 오른손은 내가, 왼손은 남편이 잡았다.

"아이고,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서로의 온기가 손을 통해 전해졌다. 엄마에게서 나온 행복이 내 세계에 행복을 불러들인다.


드디어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다를 배경으로 가족 모두 포즈를 잡았다.

푸른 바다가 나의 미션에 쪽빛 낭만을 채색했다.

마침내 나는 엄마 뒤에 서서 엄마 얼굴에 꽃받침을 만들며 사진을 찍었다.

꽃받침을 알게된 푸른 정원대신 푸른 바다에서 행복을 인화했다.

남편이 엄마 손을 잡고는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앞장서서 걸었다.

그 장면이 눈앞에서 찰깍 찍히며 빛을 내뿜는다. 하얀 빛줄기가 내 마음에 스며든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김서방이 엄마한테 잘하니까 참 보기 좋다."

얼마나 자주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을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눈앞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연은 똑바로 서서 인간에게 신성한 감정의 유무를 탐지해 주는 특이한 온도계로서 봉사한다.

우리의 무감각과 이기주의라는 약점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우러러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회복될 때 자연은 우리를 우러러볼 것이다. -자기 신뢰철학, 랄프 왈도 에머슨


사진 출처 : 챗 gpt,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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