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나들이 Jan 25. 2024

나쁜 일이 있어도 이만해서 행복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

 

대학교 시절 J는 손을 잡고 걸어가는 중년 커플을 보면 불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한 번도 부모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키 큰 아버지는 성큼성큼 저만치 앞서가고 키 작은 엄마는 종종걸음으로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나이 든 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건 드라마에나 있는 일이라고 치부했다.


J의 엄마는 6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을 왔다. 시집와보니 학교 다니는 시동생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시락 8개를 싸는 것을 시작으로 끝도 없는 집안일이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시부모의 식사를 챙기고 농사일을 돕다 보면 땅거미가 졌다. 저녁을 치우고 노곤하게 졸음이 쏟아지는 밤이 되면 학교에서 돌아온 시동생들의 야식상을 차려야 했다. 장정 4명은 저녁을 안 먹은 사람처럼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자정이 가까워 올 때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잠시 누이면 엄마 사정 알리 없는 갓난쟁이는 울음보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자려고 누운 남편이 깰세라 아기를 둘러업고 새벽녘까지 논두렁을 걷고 또 걸었다. J의 엄마에게 시집살이는 뽑아도 뽑아도 다시 자라는 잡초처럼 끊이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J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 아버지에게 숙면은 일생일대의 난제였다. 일상에 묻은 피곤을 잠으로 보상받기 위해 용하다는 약과 병원 치료, 샤머니즘까지 동원해 봤지만 어느 것 하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불면으로 인해 늘 피곤하고 예민한 사람에게 남편으로서의 다정함을 기대하는 건 사치처럼 보였다.


 J는 아버지의 불면증으로 인해 자주 이사를 다녔다. 수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해 더 외진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가 원하는 공간은 공기의 흐름도 소음의 출현도 없는 진공의 밤 같은 공간이었다.


 교회 차임벨 소리가 나서, 논에 개구리가 크게 울어대서, 한 밤중 앞 집 세탁기 소리가 커서 이삿짐을 싸고 풀었다. 때론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아도 터가 이상해서 잠이 안 온다며 이사를 해야 했다.


 때론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두 부부의 대화에는 날이 섰고 엄마의 마음엔 한이 서렸다. 긴 세월에 점철된 한 탓인지 70대가 된 엄마는 유방암을 진단받았다. 다행히 초기라서 수술을 잘 마쳤지만 지병인 당뇨와 허리협착증으로 인해 집안 살림을 돌보는 건 불가능했다.


 J는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했지만 엄마는 내가 거길 왜 가냐고 했다. 그렇다고 아버지 혼자 집안 살림을 하며 엄마를 돌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J는 고민 끝에 공기 좋은 실버타운을 물색해 엄마의 새 보금자리로 정해줬다. 엄마가 실버타운에 입소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고목나무가 긴 풍파를 견디고 싹을 틔우는 것처럼 엄마의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실버타운 입소 후 처음 맞는 엄마의 생일에 J는 차로 5시간 거리의 실버타운으로 내려갔다. 엄마의 수술 후 첫 생일은 엄마가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했다. 꽃보다 예쁜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다.

 엄마의 얼굴이 그려진 생일 케이크 앞에서 축하 노래를 부르고 나오던 길에 J는 처음으로 부모님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봤다. 아버지는 계단을 내려가는 게 힘든 엄마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엄마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짧은 계단을 내려온 후에도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J의 마음은 힘껏 불어 올린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올랐다. 비눗방울은 빛을 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유했다.

사진 출처- unsplash


 노부부는 손을 꼭 잡은 채로 '여보, 잘 지내소.' 덕담 한 마디씩을 남겼다. 평생 티격태격하던 노부부도 떨어져 지내니 만날 때마다 애틋해졌다. 역시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지구와 태양의 관계처럼 적당한 거리 유지가 좋은 관계비결인가 보다.


 J는 엄마의 유방암 발병 소식을 듣고 겁이 났었다. 엄마가 불행해질까 봐. 엄마는 의연하게 견뎠고 그 과정에서 J의 가족은 가슴에 묻어두었던 사랑과 헌신이 몸피를 부풀리는 걸 느꼈다. 가족의 보살핌으로 엄마의 삶에 드리웠던 주름이 하나 둘씩 펴지는 모습을 목도했다.


좋은 일이 있어서 행복하고,

나쁜 일이 없어서 행복하지만

나쁜 일이 있어도 이만해서 행복하다. 사랑주는 가족이 함께라면


위의 이야기는 J인 저와 우리 부모님 이야기를 소설 형식을 빌려 쓴 글입니다.


한 줄 요약 : 나쁜 일이 있어도 이만해서 행복하다. 사랑주는 가족이 함께라면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이전 05화 변하지 않는 행복의 원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