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내 삶은 언제나 울음을 삼킨 날들의 연속이었다. 웃고 떠드는 또래 아이들 속에서, 나는 늘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의 따뜻한 품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를 참 많이 사랑하지만, 살아계셨을 때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남아 있는 기억은 고통과 싸움, 그리고 그 순간을 잊고 싶어 애써 삼켰던 눈물뿐이다. 술과 담배에 기댄 채 하루하루를 버티시던 아버지. 그 곁에서 나는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길 강요받았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그래야 내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버티던 시절. 그 말은 마치 주문 같았다.
#가장 아팠던 기억 ― 고등학교 시절
내 삶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은 가난 속에서의 학창시절이다. 학교 가는 길은 길고 멀었다.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걸어 다녔다.
교통비가 없던 날들, 발이 저리도록 걷는 것은 일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버스비가, 내게는 사치였다.가끔 교통비를 쥐여주실 때면, 나는 그것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
가을 수학여행에 입고 갈 단 한 벌의 옷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친구들 옆에서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작은 바람을 이루기 위해 땀과 눈물을 삼켰다. 여름에는 땡볕 아래서 땀으로 범벅이 되어 걸었고, 겨울에는 빨간 반티 후드집업 하나로 추위를 버텼다. 스타킹 하나 신을 여유조차 없어, 파랗게 언 다리를 집에 와서 문간에서 녹이며 학교를 다니던 날들.
수학여행 전날 어렵게 새 옷을 샀을 때, 거울 앞에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언니는 크게 화를 냈다. 교통비를 아꼈던 이유가 옷을 사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나는 억울하고 서러웠지만, 지금은 안다.
그때 언니는 내 또래보다 훨씬 더 큰 짐을 지고 있었음을.
언니의 서운함은 나를 탓하기 위한 게 아니라, 삶의 무게 때문이었다는 걸.
#쉼터의 기억 ― 작은 신발의 고통
고등학교 2학년, 결국 나는 집을 떠났다. 들어간 곳은 청소년 쉼터였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꿈꾸던 안식처가 아니었다. 쉼터에서 신발이 없어, 남이 쓰다 버린 작은 신발을 신어야 했다.
내 발보다 훨씬 작은 그 신발은 매일 엄지발톱을 짓눌렀다. 고통은 매일같이 쌓였고, 결국 발톱은 스스로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민정아, 지금은 너보다 더 아픈 친구들이 있어서… 조금만 기다려줄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고통은 하찮아진 것 같았다.
아무도 내 아픔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다는 외로움이 더 무거웠다.
결국 나는 초등학교 친구의 어머니 손을 잡고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그날의 서러움은 내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외로움의 밤들 ― 그리고 나의 아버지
20대가 되어도, 외로움은 내 그림자였다. 밤마다 불 꺼진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꼈다. 아무도 내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다.”그 다짐은 나를 버티게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결국 만났다는 것을.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 아바 아버지를. 그분은 나를 선한 길로 이끄셨고, 내 삶의 어둠 속에 빛을 비추셨다.
“너는 소중하다.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음성을 마음 깊이 새겨주셨다.
#지금의 고백 ― 기억 위에 집을 짓다
돌아보면, 내 삶은 고통과 눈물로 점철된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나는 다른 눈을 얻게 되었다. 남들이 보지 못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눈, 누군가의 상처를 진심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마음.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기억이 나를 무너뜨리려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세우기 위한 기초였음을. 나는 지금 기억 위에 집을 짓는 중이다. 그 집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하지만 언젠가 완성될 것이다.
그 집에는 눈물의 방도, 희망의 창도, 사랑의 마당도
함께 자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내 글과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 그들의 어두운 방을 환히 밝힐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