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서퍼를 꿈꿨다.
변화무쌍한 파도를 넘나들며 드넓은 바다 위를 누비는 서퍼. 하늘과 바다 사이 드넓은 공간을 내 것으로 삼는 일은 상상만으로 시원한 개방감을 준다. 그리하여 난 바다로 떠났다. 이름부터 나 같은(?) 서퍼를 위한 곳임을 알리는 ‘서퍼스 파라다이스(Surfers Paradise).’ 이는 호주 골드 코스트(Gold Coast)에 위치한 해변이다. 이름처럼 이곳은 전 세계의 서퍼들이 찾는 곳이다. 포근한 날씨에 질 좋은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오는 곳이기에 서핑에 최적화된 해변이다. 고층 호텔과 상점으로 세련되게 꾸며진 도시이며, 우리나라로 치면 해운대 정도 생각하면 대충 분위기가 맞을 듯하다. 난 무려 한 달을 이곳에서 보낼 계획을 짰다. 한 달 동안 파도를 타며 짜릿한 쾌감을 느낄 생각에 첫날부터 두근두근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난 숙소를 잡고 바로 서핑 교육을 찾아 등록했다. 난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무려 5일간의 교육을 신청했다. 무려 5일 동안! 그 당시에는 지나친 과투자라 생각했다. 널빤지 위에 일어나는 짓을 5일이나 배우다니. 훗. 나란 녀석 걱정도 참 많아. 하지만 그런 준비성과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배움을 얻으려는 자세는 참으로 올바르다. 아주 참한 사람이다. 1등 신랑감이다!
하지만 난 곧 무지에서 나온 겸손은 겸손이 아니었음을, 난 내 예상을 뛰어넘는, 아니 그에 한참 못 미치는 미천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1등 신랑감은커녕 마흔이 되도록 결혼도 못 하는 노총각이 되었음을, 서핑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참고로 내 운동신경은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다. 정말 객관적으로 얘기하자면 중상은 된다고 자부한다(아직도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 한 것일까?). 하여튼 그런 내게도 서핑은 하루 이틀, 닷새 만에 되는 게 아니었음을 분명히 한다. 서핑은 정말이지 무지하게 어렵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난 닷새 교육 동안 생각처럼 수월치 않은 진도에 의아했다. 하지만 뭐 이론만 배우면 나머지는 슬슬 연습하면 곧 되겠지하는 20대의 패기어린 긍정력이 솟아났다. 어린놈이 어디서 저런 긍정적인 마인드만 잔뜩 껴있었는지...
그렇게 난 닷새의 교육을 끝내고 보드를 구매했다. 역시 숏보드가 멋있겠지? 들고 다니기도 편리하고 말이야. 그렇게 홀로 바다에 나선 첫날. 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상해. 교육 때 하던 느낌이 아니야. 물론 교육 때도 그닥 잘 된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퇴보해 버린 실력에 의아했다. 보드가 너무 작은 것일까? 숏보드는 아직은 좀 일렀을까? 교육 때 사용한 보드는 커다란 크기에 스폰지 재질로 되어 물에 뜨기 쉬운 것이었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난 바로 롱보드를 또 구매했다. 롱보드를 들고 처음 바다에 나선 날. 첫째 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감각에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아... 글렀다. 심지어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해변 근처에서 깨작거리다가 모래사장까지 보드를 타고 쭉~ 들어오는 바람에 보드 밑 세 개의 핀 중 하나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그제야 눈 감고, 귀 닫고, 주머니만 벌리며 써댄 돈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교육을 더 들어야 할까? 아니. 그거 며칠 더 듣는다고 나아질 거 같지 않은데. 아니야, 깨달음의 순간이란 게 있잖아? 한 번 더 교육을 들으면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차라리 계속 파도를 타며 스스로 깨치는 게 경제적이며, 현명한 방법일 수 있어. 난 주식에 물린 가엾은 개미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바다에 떠밀려 온 시체처럼 해변에 누워있었다.
결국 난 한 번의 투자를 감행할 배짱을 갖지 못한 소인배, 작은 간땡이의 소유자였기에 어찌 됐든 홀로 이겨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아침 핀 하나가 부러진 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해변으로 향하는 나. 상쾌한 아침 바다에 몸을 담그고 보드를 밀며 힘차게 패들링을 해 바다로 나아간다. 그리고 파도가 솟는 위치에 이르러 나의 파도를 기다린다. 눈부신 햇살과 출렁이는 파도 소리. 둥실둥실 넘실대며 나를 위아래로 어르는 바다. 고요하다. 저 멀리서 솟아오르는 파도. 다시 꺼지는 파도. 어느 파도가 내게 올지. 그저 기다린다. 그렇게 한참을 둥실거리며 기다림의 시간을 갖다가 내 것이 온다. 저거다! 난 호수 위 백조처럼 물 밑 다리를 놀려 몸을 돌린다. 그리고 보드에 바짝 엎드리고 고개만 뒤를 쳐다본다.
온다... 온다... 온다!! 드디어 나를 훑고 지나가는 파도가 나타난 것이다. 난 파도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양옆의 팔을 놀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파도와 속도를 맞췄을 때, 읏차! 양팔로 보드를 누르며 보드 위로 올라선다.
짜잔! 그리고 해변을 향해 전진하는 파도를 타고 미끄러지듯 함께 나아간다. 도중도중 보드를 휙휙 틀며 잔재주도 부리고, 다리를 위아래로 튕기며 속도를 더하기도, 보드 앞뒤로 스텝을 이동하며 균형을 잡기도... 해야 하건만 일어서는 순간 교통사고 당한 고라니처럼 튕겨 날아가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파도 속에서 빨래질을 몇 번 당하면 더 이상 바다로 나갈 체력이 없어진다. 고작 대여섯 번. 그중 운이 좋으면 한 번, 3초 정도 짜릿한 파도와의 동행을 경험한다. 물론 이것으론 모든 보상이 되지 않는다. 3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나의 하루 일과는, 호주에서의 나의 하루 목표는 끝나버린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엔 억울하지 않은가. 난 보드를 해변에 툭 던져놓고 그 위에 드러눕는다. 롱보드는 나의 키를 커버하고도 남는다. 아직 사나운 기세를 더하기 전인 오전의 햇살은 따스하고, 물놀이로(더 이상 서핑이라 부르기 민망하다) 지친 나의 몸은 나른나른 잠에 빠져들기 최적의 상태이다.
그리하여 난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잠에 빠져든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난 아직도 그 단잠의 맛을 잊지 못한다. 얼마나 꿀 같은 맛이었던가. 얼마나 사치스럽고 비싼 낮잠이란 말인가. 더위와 새로이 시작한 직장 출근으로 인해 잠이 부족한 요즘 그날의 꿀 같은 단잠이 사무치게 그립다. 아... 내 꼭 낮잠 때리러 호주 한 번 갈 것이다. 기다려라 서퍼스 파라다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