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몸을 갈아넣어 두개의 일을 동시에 해낸다
우리 병원 응급의료센터, 즉 응급실은 365일, 연중무휴, 24시간 운영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응급실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라고 있는 응급실인데!'
'편의점도 24시간으로 운영하는데,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응급실이 24시간 운영을 안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물론 맞는 말이다. 당연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병원이 문을 닫은 밤에도 환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생길 수도 있다. 그런 환자들을 위한 응급조치를 해줄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 어디에나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사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데에 있었다.
응급실은 적은 인력을 쉴 새 없이 돌려가면서 간신히 구멍을 메꾸어 돌아가는 구조이다.
간호사 선생님도 갈아 넣고 인턴도 갈아 넣고 전공의 선생님들도 갈아 넣고 교수님들도 갈아 넣는다.
옛날 영화를 보면 며칠 동안 쉴 새 없이 달리는 증기기관차 안에, 얼굴에 숯검댕이를 가득 묻힌 채 이빨만 하얗게 보이는 소년들이 쉴 새 없이 엔진에 석탄을 퍼붓는 장면들이 나온다.
나는 이 달리는 기차가 응급실, 석탄은 응급실 의료진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직접 응급실 근무에 몸이 갈려나가보면서, 이런 훌륭한 의료시스템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응급실 의료진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우리가 눈을 뜨고 감는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응급실이 힘들긴 하지만 짧고 굵게 바짝 일하면 되는 거 아닌가? 힘들겠지만 다른 과에 비하면 일하는 시간이 훨씬 짧잖아! 응급실도 할만하지'
단순히 '그냥 잠깐 빡세게 일하고 돌아가면서 쉬면 되겠네'라고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그 잠깐 일하는 시간에 밥 먹을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마저 쪼개고 쪼개서 만들 정도의 밀도로 근무한다면?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서 에너지바와 커피를 쑤셔 넣어가며 뛰어다녀야 한다면?
우리 병원 병원 응급실 인턴은 3명이다.
06:00부터 18:00까지 근무하는 Day 인턴
10:00부터 22:00까지 근무하는 Bridge 인턴
18:00부터 06:00까지 근무하는 Night 인턴
한 달 동안 10일씩 Day, Bridge, Night를 서로 바꿔가며 누구 한 명 쉬운 사람이 없도록(?) 근무를 하게 되어있다.
가장 환자들이 몰리는 10시부터 22시까지는 2명이서 일하고, 그나마 조금 여유로운 시간에는 혼자 일을 한다.
단 전공의 법에 따라 모든 전공의는 반드시 적어도 1주일에 1번씩은 오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프가 생기는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은 단 두 명의 인턴이 하루를 통째로 근무를 해야 하는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리고야 만다.
요즘 나는 아침 06:00시에 출근을 하는 Day 응급실 인턴으로 근무 중이다.
새벽이 조금씩 걷혀지는 시간, 간밤의 폭풍이 휩쓸고 난 후 고요하다 못해 적막해진 진료실(트리아지)로 들어가면 나이트 근무를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인턴과 눈이 마주친다.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온 채 눈빛으로 SOS를 보내는 동기의 등을 토닥이며, 이제 나에게 맡기라는 제스처를 보낸다.
뒤를 부탁한다며 터벅터벅 진료실 밖으로 나가는 동기의 뒷모습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인턴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지난밤 어떤 환자들이 왔었는지 쭉 저장되어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며 동기의 노고를 가늠해 보기 시작한다.
음.. 오.. 아.. 지난밤 나이트가 아니라 살았다..
동기가 남긴 처절한 흔적들을 들춰보며 나에게 다가올 매콤한 미래를 긴장되는 마음으로 하루의 업무를 시작한다.
응급실의 하루는 밀물과 썰물처럼 일정한 주기를 반복한다.
동이 틀 무렵은 썰물 시기로 간간이 오시는 환자분들을 보고, 주로는 응급실 베드에 누워있는 환자들에게 필요한 술기를 하거나 처방을 낸다.
응급실에서 하는 술기들은 코로나 검사, 인플루엔자 검사, ABGA, DRE, L-tube 삽관, 폴리 카테터 삽관, 동의서 받기 선에서 정리가 된다.
이미 내과 근무를 통해 혹독한 술기 트레이닝을 거친 인턴에게 이 정도 액팅으로는 더 이상 겁을 줄 수 없다.
ABGA 하나에 진땀을 뻘뻘 흘렸던 3,4월에 비한다면 지금은 거의 뭐 던지면 들어가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지금도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지만 더 이상 옛날처럼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장족의 발전이다.
제일 먼저 Radial artery에서 몇 번 시도해 보고,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다른 위치에서 채혈을 하면 되니까
Radial artery 한곳에서밖에 ABGA를 할 줄 몰랐던 그 옛날은 얼마나 힘이 들었던가
환자의 양쪽 손목에 바늘구멍만 여러 개 내고 결국은 다른 인턴에게 헬프를 외쳤었던 슬픈 지난날들
이제 나에게는 Radial artery, Femoral artery, Dorsal artery, Brachial artery 모두가 ABGA 고려 대상 혈관들이다.
ABGA를 여러 곳에서 할 수 있게 된 지금, 나의 인턴생활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월해졌다.
L-tube도 환자가 꿀꺽꿀꺽 삼켜주지 않으면 꽤나 10분이고 20분이고 실패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찌어찌 Tube를 65cm 정도 넣었다 하더라도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쉽지가 않았다.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요, 첩첩산중
뱃속에서 소리가 잘 들리는 건지 안 들리는 건지, 식도로 들어갔는지 기도로 들어갔는지, 또 지금 나오는 액체가 콧물인지 가래인지 위액인지..
다른 인턴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또 Chest PA를 수도 없이 찍었던 눈물겨운 지난 나날들
하지만 내과 근무를 하며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는 환자분들에게 수도 없이 L-tube를 꽂다 보니 어떻게 하면 잘 들어가는지를 느낌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 소리가 잘 들어간 소리인지 아닌지도 판별할 수 있는 귀가 생겼다.
참고로 L-tube는 환자가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수 수 숙 넣으면 잘 들어간다. 한번 꿀꺽할 때 20cm씩 넣으면 3번 꿀꺽하면 삽관이 끝나있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명언을 L-tube를 삽입할 때마다 가슴에 새기자
자꾸만 식도에서 꼬일 때는 과감하게 입안에 손가락을 넣고 손가락을 지지대 삼아 넣는 다소 위험(?) 한 방법도 때때로는 훌륭한 돌파구가 되곤 한다.
코로나 검사는 응급실을 거쳐 입원하시는 분들, 또는 입원해계신 환자의 보호자분에게 한다.
나는 검사를 대충 할 거면 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다소 원칙적인 사람이라, 무조건 정석대로 끝까지 찔러 넣곤 하는데 이 말인즉슨 환자분들이 겪는 코가 찡한 느낌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다.
내가 검사를 하고 지나간 자리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코를 비비고 계시는 환자 또는 보호자분들만 남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몇 번 나에게 검사를 받았던 분들은 내가 코로나 키트만 들고 가도 동공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인다.
환자분이 직접적으로 말씀은 안 하셔도 '아.. 왜 또.. 이 선생님이.. '라고 속으로 하는 말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듯하다.
나는 검사 전에 늘 말한다.
'환자분을 위해서 조금 깊게 넣을 거예요. 코 많이 매울 수 있습니다 '
ABGA든, 코로나 검사이든 다소 불편한 검사는 미리 많이 불편할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검사하는 과정 동안 계속 네네 잘하고 계십니다. 거의 끝났어요를 반복하면 수월하게 검사가 진행되는듯하다.
나는 환자분을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다, 환자분을 위한것이다 라는 마법의 문장을 나는 늘 입안에 장착하고 다닌다.
DRE 같이 환자가 불편한 검사를 할 때는 이 검사는 특이한 검사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항문에 손가락을 넣고 휘젓는 이 검사를, 특히나 젊은 환자분들의 경우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꼭 해야 하는 건가요'부터 해서 '제가 직접 하면 안 될까요, 제가 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나서 선생님을 드리면 안 될까요..'
특히 한창 예민할 나이의 청소년들은 정말 말 그대로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하긴 갑자기 웬 건장한 사람이 와서 바지 벗고 엉덩이를 보여달라고 하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 말 없이 검사를 받으시는 환자분들도 대부분은 허허..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것까지 하네.. 하시곤 한다.
처음부터 검사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환자분들을 안심시켜주는 기술이 많이 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위나 장에서 피가 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서 검사를 할 텐데, 지금 꼭 필요한 검사이고 많이들 하시는 검사입니다. 금방 끝나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응급실에는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연령대의 환자들이 내원한다.
외상, DI, 어지러움, 흉통, 복통 ... 등등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원인들로 1살짜리 아이부터 90세 노인까지 응급실에 온다.
병동에 근무할 때는 소화기 증상이면 소화기 증상, 호흡기 증상이면 호흡기 증상으로 딱딱 분류가 되어 입원하기 때문에 큰 틀안에서 질병을 세세하게 구분하는 데에 집중한다면,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것은 .. 그래 마치 국시 실기시험을 준비했던 것과 느낌이 비슷하다.
'54세 여환 복통을 주소로 내원하였다. 활력징후는 안정적이다'
이 한 문장을 보는 순간 다양한 소화기 질환, 여성질환을 떠올리며 적절한 질문을 통해 진단을 하고, 치료까지 설명해야 하는 게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 아닌가
응급실 진료는 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진단을 한 뒤 응급실에서 자체 처치가 가능한 환자인지 아닌지, 또 응급상황인지 아닌지까지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면허가 있긴 하지만 그동안 배웠던 것들과는 다른 새로운 것들을 새로 익혀서 근무했었던 다른 과들과는 다르게,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지금은 국가고시를 준비하며 공부했었던 응용하며 일을 하니 쏠쏠한 재미가 있다.
이렇게만 끝났다면 해피엔딩이었을 텐데, 슬프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렇게 문진을 하면서 동시에 병동에 있는 액팅까지 동시에 해야 하는, 즉 몸은 하나인데 동시에 해야 할 일이 두 개인 상황이 정말 자주 발생한다.
환자들은 진료실 안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지, 베드에 누워있는 환자들은 검사가 밀려있지
숨이 턱턱 막히고, 끊임없이 뛰어다니지 않으면, 아니 끊임없이 뛰어다녀도 몸이 하나인 이상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만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내 그림자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나를 따라다닐 거면 하다못해 코로나 검사라도 해주고 따라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그 와중에 잘 되던 술기들이 갑자기 안된다?
연료가 바닥을 찍은 지 오래되어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은 자동차가, 불안불안하게 움직이다 마침내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자기 일들도 많을 텐데 거리낌 없이 내려와서 내 액팅을 도와주는 인턴 동기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을지도 모른다.
늘 언제나 항상 이런 훌륭한 동기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렇게 오늘 하루의 응급실 근무가 끝났다.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 씻고, 밥을 먹고 간단히 내일을 준비하고 나면 또다시 잠에 들 시간이 되겠지
다음날 05:00시에 일어나 또다시 같은 하루를 시작될 것이다.
응급실에서 보내는 한 달이라는 시간, 지금까지 했고 또 앞으로 할 경험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일 거라 믿으면서 즐기려고 노력하고 힘들어도 버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