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동 저병동을 쏘다니며 몇 개월 동안 열심히 구른 인턴에게는 '술기 머신'이라는 별명이 주어지는데, 기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르고 깔끔하게 딱 일을 끝낸다는 이 별명은 인턴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 술기들 가운데 드레싱이나 동의서 받기처럼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복수천자나 척수 천자처럼 부담되는 것들도 있다.
이처럼 난이도가 있는 술기들은 매일같이 하는 술기가 아니기 때문에 환자를 보러 가기 전 다시 한번 꼭 공부를 하고 가는 편이다.
인턴생활의 한줄기 빛이자 지침서인 '베스트 인턴' 책을 펼쳐 이론을 한번 읽어보고,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본 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한번 돌려본다.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럽게 이어지고 나서야 환자를 보러 가는데 조금 번거로운 과정일지라도 환자와 의사 모두를 위한 길이라 생각하기에 이 과정을 매번 반복하는 편이다.
이처럼 난이도가 있고 간혹가다 한 번씩 하는 술기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되지만 그렇다고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강렬한' 술기는 나에게 있어 다름 아닌 '핑거 에네마' 이다.
핑거 에네마 과정/ 출처 : 시선이 머무는곳 - 티스토리
핑거 (finger) 손가락, 에네마(enema) 관장 즉 손가락 관장
술기 이름을 듣자마자 어떤 검사인지 너무나도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가 있는 핑거에네마
치료를 받는 환자가 의사에게 가장 미안해하는 이 술기는 바로 환자분의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꽉 막힌 변을 직접 빼주는 것이다.
살면서 직접 대변을 만져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반려동물 인구 1500만 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산책을 하면서 본인의 반려동물이 배설한 대변을 주인이 치워야 하니까 아마 3명 중 1명 정도는 대변을 만져볼 기회가 있을 테지
그렇다면 사람의 대변은?
사람의 대변을 만져볼 기회가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100명 중 1명? 아니 200명 중 1명?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변을 만져볼 사람은?
이 글은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 응급실 나이트 근무를 하며 환자가 없을 때 조금씩 쓰고 있는 중이다.
연기처럼 흩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잡고 있으므로 수위 조절이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미리 경고를 해야겠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계산이 안되는 상태이니, 이 글이 과도한 상상을 유발한다면 머리를 한번 휘젓고 상상을 털어내시기를 바란다.
우선 직장 괄약근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채 직장에 며칠 동안 남아있는 변은 위험한 녀석이다.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환자의 건강에도 물론 위협적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 녀석을 꺼내는 사람에게 더 위협적인 경우가 많다.
마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꿈이 좌절된 후 집안에만 머물러있는 사춘기 청소년 같은 이 숙변을 사정없이 꺼내버리는 것이 인턴의 임무이다.
세상 밖의 맑은 공기를 접하지 못하고 안에만 머물렀던 그 녀석의 냄새는 가히 어마어마하다.
장내에서 숙성될 대로 숙성되어 농축된 그 가스는 살아생전 내 후각세포를 자극했던 모든 냄새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것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
환자분에게는 정말 죄송했던 일이지만 핑거에네마를 처음 했었던 3월 초, 항문 주위에 혹시 다른 병변이 없나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한 채 손가락을 넣었는데, 그와 동시에 열린 작은 틈으로 나온 가스가 내 얼굴을 강타했다.
정말 나도 모르게 '욱' 하는 소리가 나왔고 본능적으로 볼륨을 최소화시켰지만 그 소리를 환자분께서 들으셨는지, 못 들으셨는지는 알 방법이 묘연하다.
다양한 색깔의 대변들 / 출처 : 하이닥
변비로 병원에 오시는 환자들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뉘게 된다.
변이 토끼똥이나 작은 돌멩이처럼 딱딱한 굳어버려서 나오지 않는 경우
변이 그리 딱딱하지는 않지만 괄약근의 힘이 약해 나오지 않는 경우
어떠한 형태로 병원에 오든 우선적으로 칼리메이트 같은 관장약을 먼저 시도해 본다.
노란 칼리메이트 가루를 생리식염수에 섞어서 걸쭉한 액체 형태로 만들어 에네마시린지(관장용 시린지)에 가득 채운다.
걸쭉한 미숫가루처럼 만들어진 관장액을 가득 채운 시린지를 4-5개 정도 준비하고, 넬라톤 카테터를 환자의 직장에 삽입해 관장약을 밀어 넣는다.
일반적으로는 손에 힘을 주는 대로 관장약이 쉽게 쉽게 들어가는데 가끔씩 아무리 힘을 줘도 관장약이 안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커다란 구렁이 같은 변에 카테터가 파묻혀서 그런 것이므로 세심한 손길로 카테터 끝을 조종해 다른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
성공적으로 관장액을 넣었다면 관장약이 항문 밖으로 새지 않도록 10분 정도 엉덩이에 힘을 빡 주라고 해야 한다.
관장약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은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환자분들의 말에 의하면 5분 버티는 것도 죽을 만큼 힘들다고 하던데..
관장약으로 해결이 되면야 좋겠지만 세상사 원하는 대로 되지 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며 장갑을 찾아야 한다.
핑거 에네마에 사용되는 검지손가락 / 출처 : 유토이미지
핑거에네마를 몇 번 하다 보니 변의 양상에 따라 변을 꺼내는 방법에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토끼똥처럼 변이 딱딱해진 경우는 내 손가락을 마치 삽처럼 만들어서 딱딱한 돌멩이를 손가락으로 끌어와야 한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타깃을 정하고, 적절한 타깃을 정했으면 쇠똥구리가 변을 굴리듯 항문 쪽으로 조금씩 변을 굴려온다.
손가락으로 항문이라는 골대를 향해 변을 드리블했으면, 이제 페널티 박스 안에서 손가락에 변을 하나를 올리고 그대로 항문을 향해 슛을 차면 끝이다.
그렇게 얼추 손가락으로 만져지는 10개 정도의 변을 빼내면 미션 클리어
괄약근의 힘이 약해서 생긴 변비의 경우는 변이 딱딱하지가 않다. 그래서 단단한 변을 뺄 때처럼 드리블을 하다 보면 변이 다 흩어져 버리더라
오랫동안 배 안에서 하나로 뭉쳐진 거대한 구렁이를 빼내기 위해서는 조금 인내심이 필요한데, 한 번에 빼내는 것보다는 조금씩 조금씩 수십 번에 나눠서 빼내는 방법이 안성맞춤이다.
이때 변은 부드러워서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부서지는데, 거대한 구렁이를 마치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의 스쿱을 뜨듯 손가락으로 한 스쿱 두 스쿱 뜬다.
그렇게 떠낸 것들을 적당히 손가락으로 모아 손가락으로 휙 꺼내는 것이 핵심
이때 기분은 마치 초등학교 때 비가 온 다음날 적당히 수분을 머금은 운동장의 흙으로 장난을 치는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따뜻한 흙이랄까
쇠똥구리 / 출처 : 동아 사이언스
핑거 에네마를 하러 갈 때만큼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KF94는 가볍게 뚫고 들어오는 숙성된 가스를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N95 마스크를 쓰고 장엄하게 가지만 공기 중에 딸려오는 냄새 분자를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한번 작업하고, 또 한 번 고개를 돌려 숨을 고르는 작업을 반복한다.
글을 쓰고 있자니 핑거에네마를 처음 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찔하게 떠오른다
그저 KF94 마스크 하나와 폴리 글러브 한 장만 들고 당차게 병실을 들어갔던 그날의 기억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핑거에네마는 사실 과정은 아찔해도 그 결과물을 보고 나면 상당히 뿌듯하다.
직장 끝까지 차있던 변을 잔뜩 빼고 나면 환자분들이 확실히 편안함을 느끼시고 거기에 내가 끝까지 해냈다는 데에서 오는 뿌듯함은 덤이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변비 때문에 고생을 해보았을 것이다.
여행을 가서, 이사를 가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등등.. 변비는 현대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의 파트너라고나 할 수 있을까
나도 어렸을 적 변비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유치원을 다녔을 적의 굉장히 옛날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충격이었는지 20년이 더 흐른 지금까지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변을 누고 싶어도 아무리 배에 힘을 줘도 끝끝내 변이 안 나왔던 그날
요구르트를 20개씩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이 안 나와서 결국 finger enema를 해야만 했던 그날의 기억
핑거에네마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만이 그 고통과 부끄러움과 간절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먹고 변을 누는 이 너무도 당연한 이 생리작용이 누구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생각하며 일상의 감사함을 느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