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물젤리 Mar 19. 2023

싸라 있네 싸라 있어

네 살 미남이

아파트 하원 차량 중 미남이  어린이집 차가 가장 일찍 도착한다.


늘 나랑 놀던 아이였는데  친구와 노는 맛을 알아버린 요즘, 미남이는 그네를 타면서 차가 들어오는 쪽을 살피며  하원차에서 내릴 친구를 기다린다.


"누나, 우리 산책 가는 게 어떨까"

가방도 채 벗지 않은 예쁜 누나에게 들이민다.

"안될까?"

생각할 틈도 안 주고 보채더니 옆동네 모래가 있는 놀이터로 합의를 봤고 난 삽이랑 중장비차 담은  이마트 노랑 가방을 들고 양손에 아이들 손을 잡았다.


둘은 놀이터 구석 모래밭에 털썩 앉더니 삽 한 자루씩을 들었다.


"여보 거기 파주세요"

"여보 모래는 이쪽으로 주세요"

열심히 모래를 파헤치고 있었다ㆍ


소꿉놀이라면 인형을 무릎에 앉히고

"여보, 아가가 울어요 우유 주세요"

"여보, 바나나 드실래요?"

보통은 이러지 않나?


예쁜 누나는 중장비에 진심인 어린 남자애랑 노느라

고층 아파트를 짓는 어마무시한(?) 스케일의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아파트 두 동쯤은 올리고도 남을  공기가 지났는데 땅만 열심히 파대고 당최 건물 올라갈 기미가 없었다.


"지하 3층 주차장을 만들고 있다고요"


대답 중에도 땅 파는 작업은 계속됐다.


공사현장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들이나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중장비 이름은 기본이고 세세한 구성품  이름들도 한번 들으면  절대 잊는 법이 없는 녀석이다.


춥다며 걱정하는 공사장 직원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구경중인 미남군


'지하 3층 주차장'이란 말도 지난 폭설 때

나랑 시내 아파트 공사장을 기웃거리다가  직원들이 나누던 얘기를 흘려듣지 않고 담아두었다 하는 말이었다ㆍ


'쟨 아무래도 천재야'


팔불출 맞다..



요즘 어린이집서 한글을 배우는지 기역니은을 종알대곤 한다ㆍ

어느 날 A4용지를 꺼내 자음을 쭉 써놓고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ㆍ

잠시도 일시정지 안 되는 수다쟁이 안미남군


"난 입이 아파서 이런 건 못한다고요~~"


글자만 보면 입이 아파지는 병이 또 발병했다.


나는 냉장고 간식 바구니에서 녀석이 좋아하는 어린이 치즈를 꺼내와  A4용지위에 딱 얹어두고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짚었다.


"기ㆍ역"

"니ㆍ은"

"디ㆍ귿 "


"오홋~~"

내 입꼬리가 막 수직상승 하고 있었다.


"리ㆍ을"

"네~~모"  

"끝"


치즈만 한 장 뺏기고 내 입꼬리는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ㆍ


네 글자 반이나 익힌 게 어디냐면서

 "그 연세에 참 애쓰셨네 애쓰셨어"

이 일을 전해 들은 이모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ㆍ



이런 이유로  어느 날은 미남이 천재라며  집안잔치라도

열어야 하지 않겠냐고 술렁댔다가


하나 둘 ...일곱에서 바로 아홉, 열까지도 제대로 세지 못하거나

공부를 놀이처럼 아무리 잘 각색을 해도 입이 아픈 병을 핑계 대면서 고개를 중장비차 쪽으로 홱 돌릴 때면


조물주도 무심하시지

남자도 성형외과 다니는 게 이상할것 없는 세상에

미남이를 비뚤어진 틀에 넣어 빚었는지

저런 험난할 외모를 타고난 것도 짠한데

뭘 또 포기하라는 거냐며 한탄을 한다ㆍ



불금을 핑계로 식탁에 앉아 맥주 한 잔을  홀짝거리던 저녁, 팬트리 옆  책꽂이에 가지런하게 꽂힌 책을 보며 말했다.


"저기 미남이 책은 DP 용이야?"

"당근마켓에 그냥 파는 건 어때?"



"대한민국에 한글 못 읽는 사람은 없으니 언제든 읽지 않겠어?"

미남이 엄마가 발끈한다.


그...., 글쎄

그 언제든 이 언제쯤일까.



택시를 타면 내릴 때까지 쫑알대는 미남이를 보고

쪼그만 애가 말을 잘한다며 꼭 나이를 묻는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말재주로는 네 살 보라반 아이가

아니라고 한다.


놀이터에서 늘상 미남이를 보는 아이 엄마들도 미남이에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물으며 신기해한다.


우리 가족들도 남자새끼가 말이 너무 많다고 흉을 보면서도 저놈의 주둥이는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다며

은근 대견해한다ㆍ


남들은 태어나면서 거저 얻은 준수한 외모도 물려받지 못했고

공부 재능까지 기대할 게 없는 녀석.


그래도 우리 안미남군에겐 아직 주둥이가 살아있다.


싸~~라있네 싸~~라있어

작가의 이전글 그럴 사이가 아닌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