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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달 Sep 16. 2022

< 그림자 씨 (2) >

나의 그림자 씨에게


아시겠지만 그즈음의 저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잖아요. 1년 전쯤에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는 조금씩 늘려가던 번역 일도 놓은 지 몇 달 된 때였고요. 자거나, 씻거나,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은 그냥 가만히 앉아 거실 한 구석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구석 자리는 화분이 있던 자리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잠시 외출을 하고 돌아온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사라진 화분이 있던 자리요. 거기에는 그림자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화분은 키가 1미터쯤 되는 올리브 나무가 자라던 흰색 무광 큐브 화분이었어요. 아주 흔하디 흔한 화분이죠. 아니, 그러니까 당연히 처음에는 온통 황당한 감정뿐이었어요. 화분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혼자 사는 작은 투룸에서 그 큰 화분을 못 찾는 것일 리도 없고요. 집에 들렀을만한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행방을 알지 못했어요. 물론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죠. 설사 도둑이 들었다 해도 다른 것은 다 두고 왜 올리브 나무 화분을 가져가겠어요? 그 황당함과 의아함 속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냥 거실 한켠이 허전한 것 같아서 인터넷으로 구매했던 흔한 화분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데, 그렇다고 아주 애지중지 키우던 것도 아니었는데, 저에게는 상실감이 이상하리만치 커져 갔습니다. 물체가 없는데도 그림자가 남아 있다는 게 너무나 기이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상실감과 허전함이 훨씬 더 커서 의문의 마음은 금세 사라졌어요. 올리브 나무 화분의 증발이 저에게 깊은 무기력을 준 것이죠. 그래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조차 사라져 가던 며칠 동안은 진행하고 있던 일을 간신히 끝내고, 새로운 업무 의뢰 메일은 열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몇 군데에서 전화까지 오기는 했지만,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재차 거절하자 자연스럽게 일이 끊겼죠. 원래도 거의 집에만 있는 편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칩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사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칩거라는 것이 그렇게 별일은 아니더라고요. 네이버 장보기로 각종 생필품을 바로 주문할 수 있고, 배달앱도 너무나 잘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문명의 이기에 기대 세 달쯤을 문제의 그 구석 자리에 남겨진 그림자만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화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저 그림자는 왜 남아있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그림자만 보일 수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꼬리의 꼬리를 물다가, 나중에는 딱히 별 생각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어요. 가끔 정신이 들 때는 너무 오래 이를 물고 있을 때였어요. 저는 집중하면 어금니를 악 무는 습관이 있는데, 얼마나 집중을 했던 건지 하루에 한두 번쯤은 턱 근육이 아팠거든요. ‘아, 저번에 치과에서 턱에 보톡스 맞으라고 했을 때 맞을걸’ 하는 생각도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저희 집에 들르는 친구 몇이 집 안을 온통 메우고 있는 적막을 깨기 위해 TV라도 켜면 그때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곤 했어요. 그래도 자기 전에 방으로 들어오면 침대 위에서 책은 조금 읽기도 했는데, 그림자 씨가 저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그 밤에도 저는 시집을 한 권 읽고 있었어요.


어쨌거나 두 번째로 저에게 말을 건 그림자 씨에게 대답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화분 그림자 때문이었어요. ‘당신이 진짜 그림자라면 뭔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림자들끼리는 뭔가 아는 게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오늘도 저놈의 나무 그림자만 쳐다보고 있었던 거야?’

“저, 그러니까… 저… 아니 아니, 일단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되나요?”

‘뭐 그냥 대충 아무렇게나 불러.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네, 그럼… 그림자 님? 아… 그림자 씨. 그러니까 그림자 씨가, 제 그림자라는 거죠?”

‘그렇다니까. 그림자라고, 너의 그림자.’

“그런데 그때 왜 갑자기 저에게 말을 거신 거예요? 아니 그보다도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모든 인간의 그림자는 말을 할 줄 안다고. 보통 꿈을 꾼다는 게 그림자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이렇게 멀쩡한 정신일 때 말을 거는 건 아주 드문 일이고. 뭐 어쨌든 그때 이야기했듯이 네가 자꾸 사진에 찍히는 나를 없애려고 하니까 갑자기 욱해서 그랬지.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아도 말을 걸려고 하긴 했어. 아니 도대체 화분 하나 없어진 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몇 달을 그렇게 앉아 있는 거야?’

“아니, 그럼 저기 구석에 있던 올리브 나무 화분을 아시는 거네요? 맞아요. 그게 몇 달 전에 없어졌어요. 심지어 그림자만 남겨 두고. 제가 어떻게 그림자만 볼 수가 있는 거죠? 화분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아세요?”

‘곧, 겨울이잖아. 자기네 쪽 세계로 갔을 거야, 빛깔을 채우러.’

“자기네 쪽 세계요? 빛깔이요?”

‘그러니까, 보통 내가 투영된 물건이 하나씩 있어, 사람들에게는. 그런데 재밌는 건 그 물건에 내가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본인은 모른다는 거지. 내가 딱히 의식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물건은 아니거든, 보통. 그냥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물건일 때가 더 많아.’

“그래서요?”

‘아니 그러니까, 너의 경우에는 그 물건이 올리브 나무 화분이었던 거지. 그리고 이제 곧 겨울이 되니까 너를 담아내느라고 잃었던 자기 빛을 채우러 그쪽 세계로 간 거야. 일 년 치의 빛깔을 잘 채워 두어야 죽지 않고 다시 돌아와서 널 깃들게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쪽 세계로 빛깔을 채우러 갔다… 그림자만 두고? 아니, 그 세계는 어딘데요?”

‘그림자를 두고 가야 원래 자리를 찾지.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하니까. 그리고 걔네들 세계는 나야 모르지, 우리 세계도 아닌데. 뭐, 식물이니까 식물 쪽 세계로 갔으려나. 아이, 나도 그것까진 몰라. 그나저나 이걸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보통 다른 사람들은 뭐 손거울이나, 볼펜이나, 라이터 같이 그림자도 잘 안 보이고, 없어졌다가 다시 찾아도 티가 안 나는 것들이던데. 너는 왜 하필 저 큰 화분에 깃들어서 이 지경이 되었냐는 말이지.’

“아… 그래서 저 화분은 언제 돌아오나요?”

‘그러니까, 그게 나도 의문이긴 해. 돌아올 때가 훨씬 지난 것 같거든. 빛깔을 채우는 게 오래 걸릴 정도로 잃었던 것이 많은가 봐. 네가 많이 깃들어 있었나 본데?’

“제가 많이 깃들어 있었다는 건 무슨 의미인데요?”

‘그건 네가 잘 생각해 봐. 어쨌든 화분이 그림자만 두고 없어진 게 사실 별일 아니라고. 그렇게 모-든 일을 놓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 아니니까 좀 있으면 다시 올 거야. 후.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했어. 그럼 이만.’

“잠깐만요 그림자 씨!”

‘…’

“그림자 씨!”

‘…’


제가 그날 우리의 대화를 얼마나 많이 톺아 봤는지 이렇게 줄줄이 쓸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깃든 올리브 나무 화분, 빛깔을 채우러 간 올리브 나무 화분, 그림자로 자리를 표시해 두고 간 올리브 나무 화분. 그림자 씨와 대화를 마치고는 그 올리브 나무 화분에는 도대체 저의 어떤 것이 깃들어 있는 것인지 고민하는 밤이 시작되었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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