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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달 Aug 31. 2022

< 그림자 씨 (1) >

나의 그림자 씨에게


그림자 씨,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생각해보니 꽤 오래 소식을 전하지 못한 것 같아서 오랜만에 연필을 듭니다. 방 안에 간접등을 하나 켜고, 가장 좋아하는 LP를 돌려 두고, 사각사각 깎아 두었던 연필과 편지지를 꺼내 침대 위에 앉았어요. 아, 제가 LP 플레이어를 장만했다고 이야기했던가요? 오래 벼르고 있다가 보급형으로 하나 장만했는데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아주 마음에 들어요. LP는 한 사이드가 돌아가는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하나의 음악을 듣는 것 같달까요. 네댓 곡의 음악이 연속으로 재생되는 것이지만, 바늘이 철커덕 올라가는 순간부터 철커덕 내려가는 순간까지도 다 하나의 흐름 같거든요.


그림자 씨에게는 전화도, 문자 메시지도, 이메일도 닿을 수가 없어서 온전히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편지만이 유일한 소통 방법이라는 것이 참 좋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예쁜 편지지를 보면 자꾸 사둡니다. 편지지를 고를 때마다 초등학생 시절 파스텔과 색연필, 사인펜과 스티커로 편지지를 직접 만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핸드폰을 가진 초등학생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매일 만나는 친구들과도 쪽지나 편지를 자주 주고받곤 했습니다. 그래서 예쁜 편지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주 중요했어요. 친구들과 모여서 A4 용지를 자르거나 공책을 찢어 색색깔로 밑줄을 긋고 테두리 그림을 그려서 편지지를 만들곤 했어요. 그래서인지 그림자 씨에게 편지를 쓸 때면 초등학생의 마음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아,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지는 예전 제주도에 갔을 때 작은 소품 가게에서 산 거예요. 이 노란 연필도요. 덕분에 지금 제주도의 냄새가 나는 것 같네요. 글씨에 소금 내음이 묻은 짭짤한 바람이 통하는 기분입니다. 참! 제주도에 연필만 파는 가게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무 내음이 가득할 그 공간이 참 궁금해서 다음에 한 번 들러볼까 해요. 그곳에서 고른 연필을 그림자 씨도 좋아했으면 좋겠네요.


오랜만에 편지를 써서 그런지 그림자 씨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사실 그림자 씨는 늘 저와 함께였으니 처음 만났다는 말은 좀 이상한가요? 제가 그림자 씨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된 때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아주 재밌게 읽었었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내 그림자와 분리되어 대화를 나누는 세계라니. 하루키는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지?’라고 감탄했었어요. 그런데 진짜 그림자 씨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다니. 하루키 월드의 '세계의 끝' 비슷한 상황이 실재한다니. 어쩌면 하루키도 저처럼 자신의 그림자 씨를 만난 적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림자 씨가 처음 저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해서였죠. 방 안에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서 폰카메라로 찍으려 했는데, 자꾸만 화면에 들어오는 그림자 때문에 글씨가 잘 안보였거든요. 그림자가 안 보이도록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 찰나에 그림자 씨가 저에게 소리쳤었죠. '나를 없애고 싶은 거야? 왜 자꾸 나를 숨기려고 하는 거지?'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저는 온몸이 얼어 버렸어요. 난생처음 듣는 목소리인 데다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를 질감인 그 목소리에 너무나 놀랐거든요. 생각해보면 비단 목소리의 질감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죠. 혼자 있던 그 방에 내가 내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니까요. 혼자 사는 집인 데다가 TV나 라디오를 켜 둔 것도 아니었고, 동영상을 보고 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놀랄 수밖에요.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떠다닐 때, 그림자 씨는 다시 외쳤어요. '나라고, 나! 매일 너와 함께하는데 내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거야?' 너무나 당연하게 저는 그게 그림자 씨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어요. 재차 들려온 목소리에도 저는 도저히 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마 뭔가 대답을 하려고 했더라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을 것 같아요. '휴… 이봐, 나는 너의 그림자야. 내 목소리를 잘 기억해 두라고'라는 외침이 그날 그림자 씨의 마지막 목소리였죠. 그날은 도무지 잠에 들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건가? 상담을 받으러 가봐야 할까? 하루키의 소설에 너무 빠져 있는 건가? 밖에서 우연히 들어온 소리인 걸까?’ 하는 오만가지 생각 때문에요. 그래서 밤새 환청에 대해 검색해 보기도 하고, 심리 상담소와 정신과가 있는 병원을 찾아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음 날이 되고, 또 다음 날이 되어도 그림자 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았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그날은 좀 피곤해서 잠시 착각했나 보다' 하고는 차츰 잊어버렸죠. 물론 혹시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릴까 봐 긴장하던 밤들이 있기도 했지만요.


그러다 그림자 씨가 다시 말을 건넨 것은 두 달쯤 후,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던 어느 밤이었어요. 그 밤에 오묘한 질감의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와서 저는 다시금 몸이 얼어붙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림자 씨의 말에 대답을 하고 싶어 졌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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