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림자 씨에게
그렇게 그날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우며 생각과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그 올리브 나무에 내가 스며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어딘가에 스며 있는 ’나‘를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그러다 문득 사위가 부옇게 밝아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던 일기장이 눈에 띄었고, 거기에 답이 들어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일기장에는 저의 마음 깊숙한 이야기들이 잔뜩 적혀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난 일기를 주욱 읽어 보면 올리브 나무 화분은 나의 무엇이 스며 있는 것인지 알 것 같았어요.
저는 원래 일기를 메모처럼 틈틈이 쓰기 때문에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밤낮없이 펼치곤 하는데, 어떤 날은 그냥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그날의 감정만 쓰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To. 없는 편지를 쓰기도 했어요. 어쨌거나 일단 일기장을 펼쳐서 올리브 나무 화분을 장만했던 날의 기록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독립을 하고 보니, 이 집에 생명이라고는 나뿐이라는 것이 점점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고요하디 고요한 집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괜한 외로움이 더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지난주에 지호랑 갔던 카페가 생각났다. 온갖 나무들이 가득한 식물원 같던 곳. 거기서 느꼈던 분명한 생명력이 떠올랐다. 며칠 검색을 좀 하다가 어제 결국 올리브 나무 화분을 하나 주문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고, 그냥 생김새가 예뻐서, ’올리브‘라는 말할 때 그 발음이 마음에 들어서. 근데 이거, 올리브가 진짜 열리긴 하나? 만약에 올리브를 수확하게 되면 마리네이드를 만들어야지. 아, 그러면 방울토마토도 같이 키워 볼까?
나무를 어제 아침에 시켰는데, 오늘 저녁에 바로 도착했다. K택배란... 실물로 보니 조금 톤 다운된 초록빛 이파리와 회갈색의 나뭇가지가 너무 마음에 든다. 흰색 화분과도 잘 어울려서 거실에 두니 우리 집과 퍽 조화롭기도 하고. 이제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또 다른 생명체가 생긴 기분이다. 왠지 가족이 생긴 것도 같고. 이래서 다들 식집사가 되는가 보다.
그동안 내 손에서 죽어간(?) 많은 화분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이 나무만큼은 제대로 키워야지, 다짐해 본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의 작은 올리브 나무야.“
첫 일기에서부터 알 것만 같았어요. 왜 이 올리브 나무 화분에 내가 스며 있는지. 그동안 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를 지켜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무에 물을 주고, 햇빛을 쪼이고, 온도를 챙기고, 영양제를 주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어서 쭉 읽었던 일기장에는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노래의 가사가 적혀 있었고,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티켓과 함께 잔뜩 상기된 기분이 쓰여 있었어요. 소리 죽여 울었던 밤의 하소연이 적혀 있었고,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었던 의미 있으면서도 의미가 없는 넋두리들이 적혀 있었어요. 또 몇 번을 돌려보던 영화에 대한 감상과 감탄이 적혀 있었고, 생일 선물로 받았던 향기로운 샴페인의 정보도 적혀 있었어요. 잠시 만났던 애인과 헤어지고 진탕 술을 마셨던 다음 날의 괴로움도 적혀 있었고, 우연히 들었던 라디오에서 눈물 나게 공감했던 사연도 쓰여 있었습니다. 너무나 재밌게 읽었던 책에서 발견한 문장들도, 퇴사를 고민하던 수많은 날들의 고민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겪었던 고생들까지도 촘촘히 적혀 있었어요.
지금의 저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매일의 일상 조각들이 일기장에는 한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많은 날들을 올리브 나무 역시 모두 목격했으리라 생각하니, 저를 만들어 온 수많은 순간들이 화분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아마도 제가 인지하고 일기장에 기록했던 일보다, 무의식 속에서 흘러나온 마음들이, 저도 모르게 울고 웃었던 날들이 올리브 나무에 촘촘히 스며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올리브 나무가 사라진 그날부터 저의 기록이 끊겨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어요. 그 시간 동안은 일기에 쓸만한 일들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저는 아주 무기력하고 넋이 나가 있던 상태였으니 그럴 법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홀린 듯이 오늘의 일기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올리브 나무 화분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적었어요.
“나의 것들을 털어내고 와요. 털어낼 수 있는 나의 것들은 전부 털고 당신의 빛깔을 채우고 와요. 혹시 나의 어떤 것들은 아주 깊게 스며 있어서 전부 다 털고 오지 못 하더라도, 그래도 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털어내고 와요, 스스로의 것들을 담뿍 채우고 와요. 그리고 다시 나의 것들을 촘촘히 채워 줘요.”
몇 줄의 일기를 쓰고, 일기장을 덮은 후에는 아주 오랜만에 달고 깊은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선명한 꿈을 꿨어요. 그 꿈에서 저는 어느 숲에 있었어요. 난생처음 본 숲이었지만, 태초부터 내가 나고 자랐던 곳처럼 포근했고, 어둡고 울창하고 축축한 곳이었는데도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그림자 씨가 있었고, 올리브 나무 화분이 있었어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혹은 내용이랄 것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저는 눈물이 고일만큼 거대한 아름다움을 목격했고, 아주아주 따스한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꾸어도 좋을 그 꿈에서 깨어난 것은 다시금 들려온 그림자 씨의 목소리 때문이었지요.
‘언제까지 잘 셈이야?’
“…”
‘이제 좀 일어나 봐.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왔단 말이야.’
“으음… 네..? 뭐라고요?’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라고. 정신을 좀 차려봐.’
“중요한 이야기요? 아, 그림자 씨! 올리브 나무 화분에 스며 있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제가 아까 일기장을 쭉 읽었는데 말이죠. 거기 보니까…”
‘알고 있어. 네가 일기를 읽을 때도 나는 함께 있었으니까. 일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제 앞으로 이렇게 나와 대화할 날은 오지 않을 거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원래 그림자는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지. 그래서 협회에서 나를 예의 주시하는 눈치거든.’
“협회요? 예의주시요? 아니, 그렇지만 저는 그림자 씨와 의논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많은걸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그림자 협회에서 퇴출될 수는 없다고. 뭐, 앞으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연필로 쓴 편지를 머리맡에 두고 자. 내가 밤새 편지를 읽어볼게. 나의 답은 너의 꿈에 띄워 둘 수 있어. 물론 네가 꿈을 기억하지 못할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만약 꿈이 기억난다면 그 내용을 잘 더듬어봐. 그게 내가 너에게 주는 대답이야.”
‘꿈이요? 아, 그럼 혹시 어젯밤 꿈도 그림자 씨의 답인 가요?’
“뭐, 알아서 생각하라고. 그럼 난 이제 가봐야겠어. 잘 지내.’
“그림자 씨! 그림자 씨!”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남기고 가버린 그림자 씨. 이후에 저는 몇 번의 편지를 썼어요. 꿈을 꾸는 날도 있었고 꾸지 않는 날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저는 그래도 일상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올리브 나무 화분은 돌아오지 않고, 그림자만 동그마니 남아 있는 상태고요.
그래서 저는 내일, 올리브 나무 화분을 찾아 떠나요. 이렇게 구구절절 기나긴 편지를 남기는 것도, 왠지 떠나기 전에 그동안의 일들을 제대로 떠올려 보면서 정리해두고 싶기 때문이고요. 어딘가 달라진 지금의 내가 지닌 것들이 다시 새롭게 깃들 올리브 나무 화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브 나무 화분이 떠난 곳이 제가 찾을 수 있는 세계가 맞는지조차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보다는 어디로든 나서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그동안 제가 편지로 던졌던 몇 가지 질문에 대한 그림자 씨의 대답을 가지고서 숲 몇 곳을 찾아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제 숲으로 가요. 어쩌면 중간에 찾기를 포기할 수도 있고, 정말로 올리브 나무 화분을 찾을 수도 있고, 또 그것과는 아예 다른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고, 아예 어떤 것을 잃을 수도 있을 테죠. 하지만 제 안에는 전에 없던 어떤 새로운 힘이 생긴 것만 같아요. 그리고 그 힘을 얻게 해 준 그림자 씨에게 깊고 진한 감사함을 전해요.
이제 저는 숲으로 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