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인생이 시작되는 첫날 밤

by 남산

산부인과 전공의로서 첫 근무는 공식적인 병원 일정보다 몇 주 일찍 시작된다. 첫 근무일부터 제대로 일하도록 인수인계를 받기 때문이다. 김보미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자신이 일하는 걸 보여주었다.


"봤지? 이건 이렇게 하면 돼. 다음엔 잘 할 수 있지?"


"네? 바로 실전투입? 뭐 더 자세한 건 없어요?"


"어차피 일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가르쳐 줘도 기억 못 해. 케이스가 있을 때마다 보고 배우렴."


보미 선생님은 생각날 때마다 그때그때 말해주곤 했고 나는 그걸 열심히 받아적고 정리했다. 그나저나 옆에서 보니 선생님은 정말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아침 6시에 '병원' 당직실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만 하고 바로 회진 준비. 회진 후 지시받은 각종 업무 처리, 수술 환자 소독 및 관리, 입원 환자 관련 업무 처리, 수술 보조, 오후 회진 준비, 당일 입원하는 환자 파악, 내일 수술받을 환자에게 수술 설명 및 동의서 받기 등을 하면 하루가 다 간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의무기록을 정리하고 당직실 침대로 가서 눈을 붙인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시 아침 6시! 사정이 이러니 병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봤자 가는 날이 얼마 없었다. 이게 무슨 월세 낭비람! 옆에서 선생님이 일하는 걸 보고 있자니 몹시 심란했다.


'와! 출퇴근할 시간 아껴서 일할 수 있는 게 유일한 '복지'로군...'


내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미 선생님이 봤는지 모르겠으나 선생님은 내 등을 팡팡 치면서 말했다.


"대충 이 정도 일하면 돼! 어때? 할만하지? 지금부턴 차트 정리만 하면 되니깐 넌 가서 좀 쉬고 있어. 자도 되고. 어차피 응급실 환자 오면 내가 깨워줄 거니까."


그렇다. 모든 일의 변수 응급 환자. 숨이 막힐듯한 업무 가운데 무작위적으로 응급실에 오는 환자를 진료해야 한다. 도대체가 잠조차 편히 잘 수가 없다...만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난 잠깐 누웠다고 생각했으나 정신을 잃고 잠들었다. 한 2시간 정도 잤을까? 보미 선생님이 날 흔들어 깨웠다.


"산이야! 일어나! 산모 왔어. 이미 진행이 많이 된 상태로 오셔서 조금 있다가 아기 받으러 갈 거야! 산부인과 첫날부터 산모를 부르다니... 너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지고 있나 본데?"


"전 부르고 싶지 않았는데요...."


"이제 슬슬 준비되었을 거야. 처치실로 이동하자."


"네. 선생님."


난 얼굴을 비비며 보미 선생님을 따라갔다. 분만실은 산모가 입원하는 특수 병동이다. 이곳은 입원 목적에 맞게 구역이 나뉘어 있다. 경과 관찰을 위한 입원실, 진통 중인 산모를 면밀하게 보기 위한 진통실. 물론 이는 진통하며 소리 지르는 산모를 격리하기 위한 목적도 있으리라. 그리고 분만 및 각종 시술을 위한 처치실이 있다. 진통실에서 진통하던 산모는 분만이 임박해지면 처치실로 옮겨져 분만을 준비한다.


심야에는 입원 산모의 숙면을 위해 분만실은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복도의 불을 꺼 놓는다. 그러나 입원 산모가 과연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진통 산모의 무서운 비명이 분만실 복도에 쩌렁쩌렁 울린다. 덕분에 어두운 터널 같은 복도에서도 우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다만 이 길이 맞는 인생인지는 여전히 몰라 심란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처치실에 도착해보니 산모는 분만 침대에 누워 자세가 잡혀 있었다. 산모들이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굴욕 자세이다. 그러나 인류가 오랜 역사를 거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 결과 '그나마 이게 가장 낫다'라고 판단한 분만 자세가 바로 이것이다. 선생님과 나는 질 입구와 주변을 소독하고 다리와 배를 소독된 포로 덮었다. 준비를 마친 선생님은 산모의 비명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자 다 준비됐지? 그럼 산모분! 이젠 소리 그만 지르고 그 힘까지 배에다 주세요! 있는 힘, 없는 힘 전부 모아야 아기 낳을 수 있어요!"


산모가 힘을 주자 의사와 간호사 모두 영차영차 하듯이 "끙!"하고 소리친다.


"산모분 힘을 끊지 말고 길게 줘야 해요. 더더더~더!"


그러나 역시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 세 번 정도 힘주기를 했을까? 산모가 힘을 주다가 지쳐 털썩 누웠다.


"헉헉... 선생님. 저는 아무래도 못하겠어요. 아무리 해도 안 돼요."


산모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보미 선생님이 산모를 다그친다.


"산모분! 지금 몇 번밖에 힘 안 주고 포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쉬면 이젠 정말 큰일나요! 다들 이렇게 힘들게 낳는 거예요. 정말 마지막이니 힘 좀 더 내봐요!"


선생님도 흥분해서 이게 산모를 격려하는 건지 야단치는 건지 모르겠다. 산모도 혼이 나가 얘기를 듣긴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선생님은 내게 긴박하게 지시했다.


"산이야. 너 위로 올라가서 배 좀 밀어봐!"


난 침대 위로 올라가 산모가 힘을 줄 때 두 손으로 산모의 배를 지그시 눌러주었다. 산모는 진통도 아프고, 회음부도 아픈데, 배를 누르는 것도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산모의 비명에 놀라서 손을 떼자 보미 선생님이 화내며 소리쳤다.


"야! 배 누르라니까? 그리고 산모분도 목으로 소리 지르지 말고 배로 힘주세요!"


선생님은 가차 없었지만,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 1분이 1시간 같은 긴장과 압박감이 엄습했다. 선생님은 잠시 고민 후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진짜 조금만 더 힘주면 될 것 같은데 산모가 힘이 많이 빠졌어. 너도 힘 빠져서 안 돼. 너랑 나랑 손 바꿔. 내가 배를 눌러볼 테니깐. 너는 밑에서 아기 머리 나오면 그때부턴 떨어지지 않게 잘 막으렴!"


선생님이 체구가 더 작은데 누르는 무게가 실릴지 걱정하며 위치를 바꿨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침대 위로 올라온 선생님은 기를 모으듯 심호흡하고 산모의 배에 손을 얹더니 진통이 오자 자신의 모든 기합을 실어 눌렀다. 산모가 비명을 질러도 봐주지 않았다. 다들 정신없어서 그렇지 누가 보면 꽤 정신적 트라우마가 생길 법한 장면일지도. 그 정도로 노력해야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거였다. 덕분에 아기 머리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아기가 나왔다.


'이건 뭐 마지막엔 선생님이 산모 대신 낳아준 수준이군...'


신생아는 양수에 젖어 있어 물고기처럼 매우 미끄럽다. 따라서 손에서 놓쳐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므로 온몸으로 아기를 감싸 안았다. 새 생명은 제법 묵직하고 따뜻했다. 입 안에 고여 있던 양수를 흡입해주자 아기가 우렁차게 울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온 내게 안겨 우는 아기는 전생에 나와 무슨 인연이었던 걸까.


'너도 인생이 처음이지만, 나도 산부인과 인생은 처음이야... 여태까지 살아도 아직도 흔들리는 나인지라 누구에게 인생 조언해줄 깜냥이 못 되는구나... 그렇지만 만나서 반갑고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단다. 아가야.'


아기의 몸에 묻은 양수를 닦은 뒤 포에 감싸 산모에게 안겨주었다. 표정은 눈웃음(영업용?)을 짓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한 감정과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불안한 첫걸음을 내딛는 나의 상황과 자꾸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하면서 살 수 있을까? 사고는 나지 않을까? 환멸을 느끼게 되진 않을까? 아니, 그전에 먹고 살 수는 있을까? 복잡한 감정에 눈시울마저 붉어질 뻔했는데, 아차! 보미 선생님이 보고 있었네. 마스크 위로 보이는 선생님의 눈빛이 뭔가 묘하다.


'역시 넌 산부인과 체질이야~!'


분명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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