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의 진실 게임

by 남산

며칠 뒤 모처럼 시간이 나서 김보미 선생님과 난 병원 밖 근처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산부인과 후배로 들어온 나를 환영하는 조촐한 회식이다. 달궈진 철판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보미 선생님이 술을 따라주었다.


"산부인과에 온 걸 환영해! ○○과 지원했다가 떨어진 건 잊어버려! 뭐 그런 과를 하려고 했니! 나중에 네가 ○○과 동기들보다 훨씬 잘살고 있을걸?"


"하하하... 네."


아직 서운함이 가시지 않은 상처엔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한들 소금을 뿌리는 듯해 가슴 아팠다. 하지만 어쩌겠나. 보미 선생님이 날 떨어지게 만든 것도 아니고. 억지웃음으로 화답 후 술을 홀짝 마셨다.


"나는 일이 남아있어서 더 마시진 않을게! 어쨌든 시무룩할 필요 없어. 기운 내!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거지. 우리 서로 한번 잘해 보자."


"네. 선생님."


보미 선생님은 술을 마시진 않았지만, 분위기는 취했다. 우린 서로가 알 만한 사람들을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산부인과를 거쳐 갔던 동기가 결국 무슨 과 전공의가 되었네', '그 애가 산부인과에서 일할 때 어땠네' 같은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면 참 시답잖은 이야기인데, 보미 선생님이 장단을 맞춰주는 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무슨 과를 지원했는지 같은 건 아마 선생님이 사전 조사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낙오된 인턴을 다른 과보다 빨리 산부인과 추가 모집으로 끌어들일 홍보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걸 병원에선 소위 '이삭줍기'라고 부르곤 하였다. 다시 생각하니 스멀스멀 열 받는 일이다.


'이 모든 게 ○○과와 산부인과가 사전에 짜고 친 어떤 검은 계략 같은 건 아니겠지? 날 산부인과로 넘기겠다는? 왜 하필 나야?'


당연히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냉정한 사고를 못 하고 또 울적하기만 하다.


"아니 왜 술 마시다 말고 생각에 잠겨 있어? 취한 거 아니지?"


"아뇨. 아뇨.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저으며 짐짓 미소를 지었다.


"응? 무슨 생각인데~? 설마! 벌써 도망치고 싶은 거야?"


"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거참 눈치 하난 빠르군. 나는 내심 뜨끔하여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음 뭐로 화제를 돌리는 것이 좋을까... 나는 급한 마음에 친구를 내다 팔기로 했다.


"사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응 뭔데? 뭔데? 아무거나 물어봐도 좋아! 산부인과 아니어도 돼! 뭐 여자 필요하니? 소개해 줄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지난달에 산부인과에서 인턴 근무하고 간 친구요. 선생님 혹시 그 친구랑 무슨 일 없었어요?"


"엥? 나 말이야? 무슨 일?"


"인턴 회식 때 말이에요."


난 지난번 숙소에서 친구에게 지나가듯이 들은 무용담(?)을 선생님께 털어놨다. 인턴은 어떤 특정 과에 속해 있지 않고 한 달씩 여러 과를 순환 근무한다. 비록 사람들이 실습 학생과 많이 착각하곤 하지만, 인턴은 병원에 수업료 내고 참관하러 온 것이 아닌 엄연히 월급 받고 일하러 온 의사이다. 전문적인 진료는 하지 않으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는다. 간단한 소독, 동의서 서류 업무부터 밥 시키기, 프린트, 자료 정리 등 각종 잔심부름 등 비서 업무까지 다 한다. 산부인과의 경우 전공의가 부족하므로 보미 선생님을 보조하는 일을 많이 했다. 산부인과 인턴의 마지막 주에 선생님은 늘 인턴을 데리고 조촐한 회식을 하곤 했다. 그건 한 달 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마 인턴을 산부인과로 꼬시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 놈은 어이없게도 남녀 관계로 유혹하는 거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 선생님 자취방에도 갔어요? 그 녀석, 자기는 무슨 일 생기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여자 친구 생각하며 위기(?)를 잘 넘겼다고 은근 우쭐대던데..."


"엥? 그랬나!? 하하 어이없네. 걔가 여친이 있든 없든 내가 뭔 상관이야~"


보미 선생님은 잠시 골똘히 머리를 굴리더니 손뼉을 '탁' 치며 소리쳤다.


"생각났어! 그 녀석 그날따라 술을 너무 마시더라고. 걔가 곯아떨어져 버리면 나 혼자 사내자식을 어떻게 옮기니. 처치 곤란하니깐 집으로 보냈지. 잠을 자도 병원 숙소 가서 자라고. 그런데 그 녀석 자꾸 집에 안 가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거야."


"하하...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안 되겠다 빨리 가라고 그랬지. 그렇게 길을 가고 있는데 그놈이 뜬금없이 화장실이 급하다고 낑낑거리는 거야~ 내가 그럼 얼른 병원 가서 싸라고 했더니 자기는 엄청 급하다고 우리 집에 가면 안 되겠냐는 거야. 내가 병원 근처에 자취하거든.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이가 없었지. 병원이나 우리 집이나 거기서 거긴데 말이야."


"헐.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뭐 걔가 하도 낑낑거리니깐 집에 데려가서 잠깐 화장실 쓰게 해줬지. 볼일도 한~참을 보더구먼."


"그걸 또 들어줬어요?"


"그럼 뭐 어떡하니. 어쩐지 볼일 시원하게 다 보고도 똥 묻은 것처럼 쭈뼛쭈뼛 안 나가길래 '뭐지 이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속마음이 아주 그냥 새카만 놈이었구나~ 생긴 건 샌님같이 소심한 게 말이야. 자기가 아랫도리가 급해서 화장실 가자고 해놓곤 여자 친구는 왜 생각해? 웃긴 놈이네. 크크크."


"그리곤 별일 없었어요?"


"응! 화장실 다 썼으면 집에 가라고 하니깐 머쓱하게 가더라. 그게 다야. 별것도 아닌 거로 이상한 자랑을 하네? 남자들이란!"


막상 듣고 보니 생각보다 싱겁고 더러운 얘기였다. 뭐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대개 그렇지만. 은근 뭔가 기대하며 듣고 있던 내가 다 머쓱해졌다. 하지만 그날 밤의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거지. 친구의 말이 허풍일 수도 있고 보미 선생님이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둘 다 내게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소문이란 게 그래서 뜬구름처럼 부푸는 거 아닐까? 그러니 오늘의 이야기도 한 잔의 술처럼 흘려 넘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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