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그가 선택한 것
"난 너 같은 사람을 처음 봐"
"처음 보다니요?"
"가족은커녕 친척조차.. 아무도 없이 혼자 사는 사람"
잠시 정적이 흘렀고, K는 내가 타 놓았던 소맥을 들이키더니 어렵게 말을 이어나갔다.
"네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왜 가정환경을 보는지 생각해 봤는데 결국 인성을 보는 거였어.. 그런데 너는 신기하게 티가 하나도 안 나. 정말 밝고"
K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입양아 출신에 새 가족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다시 1인 가구로 남은 나의 인생은, 이혼가정쯤은 흔해진 요즘 세상에서도 처음 들어보는 기구한 스토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쓰러운 사람도 아니었고, 그에게 위로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최대한 자신의 입장에서 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지 현명하게 판단하길 원했다.
"난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이미 다 극복한 이야기고 이게 내 인생이라고 받아들였어요. 여기서 거절해도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하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K가 설계한 미래 속에는 내가 존재했다.
그는 나를 수도권 근교에 있는 한 해변으로 데려가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본인 소유의 땅을 보여주고 여기에다 카페를 지어야 할지 펜션을 지어야 할지 함께 의논했다.
"각자 부모님께 최대한 지원받아서 다가구 주택을 짓자. 세도 주고 1층에는 브런치 카페를 하는 거야, 너 브런치 잘 만드니까 그때까지 요리학원도 다녀봐"
K는 보통의 남자들이 연인과의 여행을 빌미로 꿈꾸는 큰 그림(?) 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함께 그리기 위해 나를 바다에 데려온 것이었다.
반면, 나는 K의 희망찬 계획을 들으며 그와 헤어질 각오를 다졌다. 그가 구상한 계획 속에 나라는 존재가 들어가면 커다란 차질을 빚을 테니까.
K는 매사에 계획적이고, 계산적이며, 오직 재산 증식을 목표로 앞만 보며 달려왔던 사람이다.
아마도 그는 손해 보는 선택을 하진 않을 거다.
서로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결심했다.
나흘 전, K에게 나의 인생의 전말을 고백한 후 춘천으로 떠났다. 그렇게 일상 속에 홀로 남겨진 그는 내가 던져놓은 난제를 푸느라 3박 4일간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자정이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에 그를 다시 만났다.
무겁고 어색한 공기에는 술이 필요하다.
그의 집 앞에 있는 포차에 가서 해물 순두부찌개에 소맥을 야무지게 말아 한 잔씩 나눠 마신 후, 그가 어렵게 처음으로 꺼낸 말은 "난 너 같은 사람을 처음 봐" 였다.
K는 이미 나를 좋아해 버려서 안고 가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부모님의 지원은커녕, 부모님조차 없는 나를 선택한다면 온갖 편견과 함께, 그의 촘촘한 미래 계획 속에 뻥 뚫려버린 경제적인 공백까지 메꾸어야 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맞바꾸기엔 너무 비싼 댓가다.
"나 하나도 안 불쌍해요~ 오빠 아니어도 만나 달라는 남자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오빠 입장에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말고!"
"됐어 시끄럽고! 만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다음날 아침, 그의 집에서 눈을 떴더니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말끔한 셔츠 차림의 K가 말했다.
"냉장고에 먹을 거 많으니까 꺼내 먹고, 푹 자고 있어"
춘천에서 얻어온 여독 때문인지, 어젯밤 대화들의 무게 때문인지, 몰려드는 피로함에 느지막이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더니 K의 호기로운 말과는 달리, 딱히 먹을만한 게 보이질 않는다.
야채 칸을 열어보니 샤인 머스캣 세 송이가 있길래 손에 잡히는 대로 포도알을 뜯어 컵에 담아 먹었다.
다 먹고 컵을 씻으러 설거지통 앞으로 왔는데
미처 씻지 못한 접시 하나, 쇠젓가락 하나, 소주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참 외로운 조합이다.
그것들을 보니 훗날 그가 생각이 바뀌어 내 곁을 떠난다 해도 나는 기꺼이 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충분히 고민했고, 충분히 포기했고, 충분히 용기 있었던 오늘의 그로 난 되었다.
나는 소주잔에 묻어있는 그의 고민들을 수세미로 닦아내며
미래에 내 곁에 있을 그도, 나를 떠나버릴 그도 진심으로 행복하길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