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정답 없는 조별과제를 해낼 수 있을까?
"잘 지내고 있어? 안부 인사!"
카톡이 와서 들여다보니 9개월 전 결혼정보 회사에 처음 가입했을 때 소개받았던 사업가 K였다.
훤칠한 키에 수트가 잘 어울렸던 훈남이었는데 초면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놓아서 당황스러웠지만 그만의 무례하고도 독특한 캐릭터는 신기하게도 금세 적응이 되었다.
당시에 애프터 약속을 잡다 시간이 맞지 않아 흐지부지되었는데 계절이 한 바퀴 돌아서야 다시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응 난 잘 지냈지~ 요즘 연애해?"
"아니요?"
"그럼 저녁이나 먹자 조만간 연락할게"
며칠 뒤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K가 찾아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랜만이네"
"작년 겨울에 만났었는데 벌써 9개월이나 흘렀네요"
"아직도 결정사에서 소개받아?"
"아니요? 그쪽에서 저를 포기한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웃음)"
"너가 올해 서른다섯인가?"
"네 서른다섯이요 오빠가 서른아홉이었죠?"
"응 맞아~ 그동안 연애는 좀 했고?"
"하긴 했는데 얼마 못 갔어요 오빠는요?"
"나도 연애했지"
저녁을 먹으며 K의 지난 연애사를 들었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다. 띠동갑이 훌쩍 넘는 22살 프로골퍼와의 연애, 미모의 코스메틱 CEO와의 연애, 집안 반대와 맞서다 포기한 재벌 2세와의 연애,
K의 TMI덕분에 가장 재미있다는 남의 연애사를 공짜로 들을 수 있었다.
"근데 작년에도 엄청 결혼하고 싶어 하시더니 아직도 성과를 못 내셨네요"
"그니까 이젠 진짜 결혼하고 싶어! 내가 눈이 높아서 그런가?"
"어떤 여자랑 결혼하고 싶은데요?"
"음.. 당연히 예뻐야 하고 어느 정도 능력과 재력도 있었으면 좋겠고 자식 교육하려면 머리도 좋았으면 좋겠고 소박했으면 좋겠고 두루두루 밸런스가 갖춰진?"
"그런 여자가 존재해요?"
"응 바로 전에 연애했던 친구가 그런 친구였어"
"근데 왜 헤어졌어요?"
"여자가 너무 쎄더라 화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라고"
"뭘 잘 못했길래 소리까지 지를 정도로 화나게 만든 거예요?"
"아.. 음.. 밥 먹자! 어서 먹어"
당황한 K의 얼굴을 보니 웃겼다.
K는 작년에 카페에서 커피 한잔했던 사이일 뿐이었는데 특유의 무례하면서도 프렌들리(?)한 성격 때문인 건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지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람?"
"그런 거 아니야! 바람이면 억울하지도 않지.."
"다 갖춘 사람인데 소리 질러도 참았어야죠"
"안돼, 성격 안 좋은 여자는 절대 못 만나겠더라"
이로써 K의 신붓감 조건에 외모, 능력, 재력, 학벌에 + 성격 좋은 여자라는 조건이 또 붙었다.
"근데 왜 절 만나러 오신 거예요? 번짓수 잘 못 찾은 것 같은데 저 뭣도 없어요~"
"너 뭐 없어?"
"네 결정사 프로필 안 봤어요?"
"자세히 안 봤는데? 괜찮아~ 요즘은 그래도 순위를 매겨서 어느 정도 타협을 했어"
"그럼 순위별로 다시 나열해 보세요"
"외모는 포기할 수 없고 그다음은 성격, 세 번째부터는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리 찾아봐도 완벽한 사람은 없더라고"
나의 장난 섞인 질문에 진지하게 고심하면서 순서를 정하는 걸 보니 K는 정말 간절하게 결혼을 원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와 커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카페 어디로 갈래요? 투썸? 스벅?"
"아니? 저기로 가자"
그는 저렴한 프랜차이즈 카페로 나를 데려갔다.
"뭐 마실래요?"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저도요"
내가 신용카드를 꺼내자 K는 내 카드를 뺏어들더니 키오스크에 넣고 익숙하게 주문 버튼을 눌렀다.
"와~ 커피 두 잔에 4천 원이면 진짜 싸네"
"괜히 비싼데 가서 사 먹지 말고 커피는 이런 데서 마셔~ 돈 모아야지!"
포르쉐 끌고 오신 분이 커피값 아끼라고 잔소리하는 걸 보니 마음에 딱히 와닿진 않았지만 토달기 귀찮아서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 걸을래? 난 걷고 싶은데"
"좋아요 저도 걷고 싶었어요"
우리는 단돈 이천 원인데 그란데 사이즈에, 맛도 좋은 최고의 커피를 손에 들고 네온사인 가득한 밤거리를 걸었다. 초가을이라 밤바람이 선선한 게 걷기 딱 좋은 온도였다.
K와 나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걸으며 연애관, 결혼관, 미래의 인생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디로 튈지 모를 것 같아 보이던 K였는데 겉모습과는 다르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아주 구체적인 인생계획 속에 화목한 가정을 이룬 자신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 그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우리가 잘 안 돼서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누가 더 빨리 갈 것 같아요?"
"내가 먼저 갈 것 같은데?"
"에이~ 제가 먼저 가죠! 저는 자기 객관화가 되어있어서 타협할 줄 알아요 오빠는 눈이 너무 높잖아요"
"난 그래도 결혼에 대한 의지가 있잖아 너는 위기의식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데?"
"제가 그래 보여요?"
"응 그래 보여"
"하긴.. 위기의식은 없긴 해요 그래도 언젠가는 짝을 만나겠죠"
"그렇게 생각하기엔 우리 나이를 무시할 순 없지, 지금이야 누구와도 연애를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지나면 그마저도 힘들어지니까"
K의 말대로 우린 결혼시장에서 마지막 매각 타이밍을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결정사에서 포기한 낙제생들끼리 서로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으니 제3자가 보면 우스운 광경이 따로 없었다.
"저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요 집에서 쉬고 싶다가도 그 시간에 소개팅을 한 번 더 나가보.."
"소개팅 너무 많이 받으면 오히려 더 못 만나! 한 사람에게 온전하게 집중해야 결혼할 수 있어. 우리 나이 때 만나서 속전속결로 결혼하는 사람들은 마인드 세팅부터가 달라.
전에 잠깐 만났던 여자가 있었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감정이 크지도 않았을 땐데 내가 아프다고 하니까 약까지 사들고 집 앞으로 찾아오더라고, 나는 호감이 많진 않았지만 그런 확신 있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고 결혼을 그려보게 되더라.. 그 여자 며칠 전에 시집갔던데?"
"와.. 시집갔어요? 대단하네!"
누군가의 결혼 소식은 낙제생들 사이에서는 성공신화와도 같았다. 정말 그의 말대로 사랑하겠다는 마인드를 미리 세팅해놓고 대상을 찾는 게 맞는 걸까?
생각해 보니 그녀의 연애관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율적이다.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우연히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가 운 좋게 땅에 자리를 잡고 새싹을 피우는 기적의 원리라면
미리 사랑할 결심을 하고 만나는 이성마다 집중하는 그녀는 농사를 짓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미 완벽하게 갈아둔 밭에 적합한 열매를 찾아 심어놓고 준비해두었던 물과 거름을 충분히 공급하면서 농작물을 키우는 원리와도 같지 않은가?
당연히 그녀의 "사랑"이라는 농작물은 나의 사랑보다 훨씬 빠르게 자랐을 거고 그 결실은 결혼이었다.
서로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소울메이트를 만나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해맑은 로맨티스트였을까?
결혼 낙제자한테 훈계를 듣는 좀 더 모지란 낙제자는 혼란스러워졌다.
"요즘 만나는 남자 없으면, 집중한다는 생각으로 나 만나봐봐"
집에 가는 길에 K가 "결혼달성"이라는 조별 과제를 제안했다.
과연 꼴찌들끼리 이 어렵고도 정답 없는 조별 과제를 해낼 수 있을까?
"오늘 고마웠어요 잘 가요~"
대답 대신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마음 한켠은 싱숭생숭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