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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Feb 03. 2023

걸레 같은 삶

부처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스스로 걸레가 된다


"종교를 가져보는 건 어때?"

수화기 너머로 슬기가 이야기했다.


"생각해 본 적은 있는데 입문하는 방법도 모르고 매주 찾아가기에 번거로워서"


"난 언니가 종교 하나쯤은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 또한 슬기의 말에 동감한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낸 내 인생에서 그동안 기댈 종교 하나 없었던 게 용한 일이긴 했다.


그동안 내게 수호신이 존재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신의 형상을 구체화하진 않았다.


내가 종교를 갖지 않은 이유는 새로운 커뮤니티에 들어가야 한다는 번거로움도 있었으나, 종교색이 뚜렷해지면 편협한 시각을 가지게 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일들을 하나의 교리에만 기대어 해석한다는 건 편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조언을 구할 사람이 점점 사라져 갔다.


어릴 땐 부모와 스승에게 모든 걸 물어왔지만

이제 보니 모두 제각기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삶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인간들의 통찰력을 한참 초월하는 혜안을 가진 성인들은 분명 존재했고 확률적으로 종교인이라는 직군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어릴 때는 교회나 절에 가면 노인들이 많은 걸 보고 나이가 들면 심신이 나약해져 종교에 기대게 되는구나 생각했는데, 더 이상 조언을 구할 곳 없는 사람들의 종착지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다양한 종교들을 존중하지만

가장 나의 본능이 이끌리는 교리는 불교인 것 같다. 살면서 궁지에 몰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법륜 스님의 책을 찾아보곤 했다.


며칠 전 법륜 스님의 책 [깨달음]을 읽고 나서 충격을 받아 그날 밤 잠이 오질 않았다.


2014년, 영화관에서 인터스텔라를 보고 돌아와 주인공의 딸 머피가 연구실에서 서류를 흩뿌리며 유레카!를 외치는 장면에서 짙은 여운을 받아, 잠 못 이뤘던 새벽과 같은 느낌이었다.


법륜스님은 인간을 4단계의 삶으로 나누어, 범부 중생이 부처로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했는데

인생에서 네 차례의 큰 깨달음을 얻으며 부처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원효대사의 삶을 빗대었다.




원효 스님은 출가하기 전 신라의 화랑이었다.

전쟁에 나가면 늘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맹렬하게 싸웠다. 전쟁에서 지면 슬퍼하고 분개하며 복수를 다짐했으며 새롭게 도전해 기어이 승리하였다.


이런 삶의 형태는 첫 번째 단계이자,

일반 범부 중생들의 삶인 사법계 차원의 삶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화랑이 전투에서 전사하자

친구의 무덤 앞에서 복수를 맹세하다가 문득 '지금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 군사들은 축제를 즐기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친구의 죽음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시각, 상대 진영에서는 축배의 잔 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전에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해 기뻐하고 있을 때 적군은 지금의 자신처럼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며 복수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똑같은 일을 두고 한쪽은 통곡하고 다른 한쪽은 축배를 드는 모습에서 그는 삶의 모순을 보았고, 인간의 삶이 도깨비장난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자

원효 스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스스로 머리채를 자르고 출가했다.


이는 두 번째 단계인 이법계 차원의 삶이다.




원효 스님은 열심히 불경을 보고 수행 정진했지만 스스로는 자기 공부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많은 경전을 구할 수 있고 큰 스승이 많은 중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떠났고 고구려 땅을 지나는 길에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도망쳐 나와


이번에는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겠다는 계획으로 바꾸어 바다로 향하던 어느 날, 비가 쏟아져 토굴 속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났다.


사방이 깜깜한지라 주변을 더듬으니 그릇 하나가 손에 잡혔고 그 그릇으로 물을 떠 마셨는데 물맛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토굴은 무덤이었고, 어제 물을 떠서 마신 그릇이 해골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왈칵 구역질이 났다.


원효대사는 바로 그때 '아, 일체가 다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구나!' 라는 일체유심소조 一切唯心所造 의 이치를 깨달았다.


원효 스님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한 생각이 일어나니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지네.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바이거늘"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줄을 알았으니 굳이 중국에 갈 이유도 없어졌다.

이 스승 저 스승을 찾을 이유도, 이 책 저 책을 뒤질 이유도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라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깨달음의 눈이 열리고 나서 경전을 읽으니 쉽고 재미있었다.


여기까지의 성찰이

세 번째 단계인 사사무애법계 차원의 삶이다.




원효 스님은 어느 날 외출했다가 분황사로 돌아오는 길에 대안대사를 만났다.


대안대사는 원효 스님보다 나이가 많은 스님으로 저자 바닥에서 일반 대중과 어울려 사는 특이한 스님이었다.


그는 원효 스님을 보자 반갑게 인사하며 아는 척을 했다.

"대사, 대사가 쓴 글은 대단히 깊이가 있더군"


대안대사는 원효 스님을 칭찬했고 어디 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며 원효 스님을 천민들이 사는 동네로 데리고 갔다.


원효스님은 그때까지 천민 동네에 가본 적이 없었다. 젊어서 화랑이었을 때는 귀족 출신이었고, 출가해 스님이 된 뒤로도 천민 마을 민가에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대안대사는 주막집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앉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주모! 여기 귀한 손님 오셨으니 술상 하나 봐주게"


술상을 봐달라니 그건 출가 승려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효 스님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바로 뒤돌아 나왔다.


"이보게 원효대사! 원효대사!"

다급한 대안대사의 부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막을 나오는 원효 스님의 뒷전을 향해 대안대사가 외쳤다.


"대사!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을 지금 여기에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순간, 원효대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보살의 중생 구제 사상이었고, 원효 스님은 바로 그 보살 사상에 대한 탁월한 이론과 해석 때문에 명성을 얻은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불구부정이고 다만 마음이 짓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천민 동네의 주막은 부정한 곳이라고 뛰쳐나왔던 자신의 행동이 불법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치로는 깨쳤지만 막상 삶에서 실천이 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되었다.




그 뒤 원효 스님은 승려들을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그만두었다.


남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대신에 머리를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 승려들이 모여 공부하는 절에 들어가 부목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승려들의 스승이었던 사람이 형상을 바꾸어 젊은 승려들에게 무시당하며 절의 부목이 되어 밥을 짓고 불을 지펴주며 살았다.


그런데 그 절에 꼽추 스님이 있었는데 다들 그 스님을 방울 스님이라고 불렀다. 걸식을 할 때 말없이 방울만 흔들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으로 부른 것이다.


방울 스님은 공양 때가 되면 다른 스님들과 같이 제때에 와서 밥을 먹지 않고 설거지가 끝난 뒤 부엌에 나타나서는 누룽지 남은 게 있으면 달라고 해서 먹곤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스님들은 물론이고 부목들까지 무시하고 놀렸지만, 방울 스님은 개의치 않고 누룽지를 얻어먹고는 히죽 웃으며 돌아다녔다.


원효 스님은 그런 방울 스님을 불쌍히 여겨 늘 자비로운 마음으로 잘 대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루를 닦던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며 논쟁을 하던 학승들의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엿듣다 답답해져 자기 신분이 부목인 걸 깜빡 잊고 불쑥 끼어들어 정답을 이야기했더니 절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니, 이 부목 놈이 어디 스님들 공부하는데 와서 아는 체를 하는 게냐?"


그제야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달은 원효대사는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소인이 뭘 모르고 입에서 미친 소리가 나왔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공부의 판이 깨진 스님들은 스승을 찾아가 [대승기신론]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어렵다 하소연하였고, 스승은 더 쉽게 풀어낸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를 주면서 공부하라고 했는데


스님들이 그 책을 읽어보니 내용이 그 미친 부목이 한 소리와 같지 않은가?


스님들은 부목의 정체를 의심해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원효 스님은 신분이 들통날 위험에 처하자 몰래 절을 떠나기로 했다.


모두가 다 잠든 시각,

원효 스님이 살짝 대문을 열었는데 그때 문간방에 있던 방울 스님이 방문을 탁 열고는 이렇게 말했다.


"원효, 잘 가시게"


방울 스님의 한 마디에 원효대사는 그 자리에서 확연히 깨달았다.


그 절에 살던 스님들은 신분을 숨긴 원효대사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원효대사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과 공부 수준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원효대사는 방울 스님을 몰랐지만, 방울 스님은 원효대사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원효대사가 보살행을 한답시고 신분을 숨기고 학승들 비위를 맞추며 받드는 모습과, 누룽지를 달라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는 모습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꼽추에다가 다른 스님들에게 무시당하는 방울 스님은 사실 남에게 동정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효 스님보다 도력 높은 훌륭한 스님이었다.


그런데도 원효 스님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방울 스님을 불쌍히 여겼던 것이다.




원효 스님은 그제서야 과거 천민 동네의 주막에서 대안대사가 자신의 뒷전에 대고 외쳤던 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대사!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을 지금 여기에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이오?"


당시 원효 스님은

"네가 진짜 보살이라면 이 천민 동네에 사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깨우쳐서 구제해야지, 자신의 명성과 명예를 생각해서 도망가는 놈이 보살은 무슨 보살이냐?" 이렇게 해석했다.


그래서 자신의 명성과 명예를 다 버리고 이곳에 와서 가장 낮은 신분인 부목으로 생활했던 것인데


이제 보니 대안대사가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이라 했던 대상은, 바로 원효 스님 본인을 가리킨 거였다.


옳으니 그르니, 깨끗하니 더럽니, 술집에 가도 되니 안 되니 하고 분별하고 있는 그놈이 중생이라는 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분별심을 내는 네놈이 중생인데 어디 따로 밖에서 중생을 찾고 있느냐!"는 질타였던 것이다.


대안대사는 천민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구제하려고 거기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는 이미 분별이 끊어졌기에 그냥 거기 와서 같이 살았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안대사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이렇게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니,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은 도인이 원효 스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원효 스님은 그 길로 천민들이 사는 동네로 갔다.


물론 그들을 구제하러 간 건 아니었다. 내가 너를 구제한다느니 하는 '나'와 '너'의 분별이 사라졌으니 그들은 더 이상 구제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도반이었다.


그런데 천민 마을에 가자마자 원효 스님은 또 다른 장벽에 부딪쳤다. 마을 사람들이 위대한 원효대사님이 오셨다며 떠받드는 것이다.

그 유명한 '원효대사'라는 이름이 장애가 되고 있었다.


그 뒤 원효 스님은 요석 공주와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제까지 원효대사를 위대하다고 떠받들던 왕족과 귀족, 스님들이 원효 스님을 손가락질하며 절에서 추방해 버렸고


위대한 스승이 하루아침에 아주 형편없는 놈이 되자, 그제서야 천민 마을 사람들은 원효 스님을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원효대사라 불리던 위대한 스님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칭하며 천민들과 어울려 깡패, 술꾼, 사기꾼, 도둑 같은 사람들과 친구로 지냈다.


그런데 그렇게 원효대사와 어울려 살던 천민 마을 사람들이 몇 년이 지나자. 도둑은 스님이 되겠다 하고, 살생하던 사람은 살생을 멈추고, 깡패가 착실하게 일을 하고, 술꾼이 술에 취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인연 따라 천백억 가지로 화현하는 모습, 보살행의 마지막 단계인 화작(化作)이다.


이 삶은

네 번째 단계인 이사무애법계 차원의 삶이며

그는 이 땅에 나타난 진정한 부처였다.




나는 책장을 덮고 감격에 차올라 가파른 숨을 몰아쉬었다. 그동안 읽어왔던 에세이나 자기계발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동안의 나는 근묵자흑, 유유상종의 사자성어를 정답처럼 생각하며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삶이 부처가 되어가는 4단계의 삶에서 원효 스님이 천민 마을 주막에서 뛰쳐나왔던 고작 2단계 이법계 차원의 삶이었다니..


법륜 스님은

일반 범부 중생의 삶을 사는 첫 번째 부류와, 그들과 거리를 두는 두 번째 부류는 확연히 구분이 된다고 하였고


"일체가 다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구나!" 깨달은 세 번째 부류는 첫 번째 부류와 함께 있어서 구분이 잘 안 되지만, 가만히 관찰해 보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누가 욕을 해도 화내지 않고, 술자리에 같이 어울려도 술을 마시지 않으며, 친구처럼 지내도 뭔가 특이하고 비범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네 번째 부류는 오히려 첫 번째 부류와 구분이 안된다고 한다. 술꾼과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욕하는 사람과 같이 욕하며 살고 있으니 구분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울려 지내다 보면 어느새 술꾼 친구가 술을 마시지 않게 되고, 욕쟁이와 같이 욕하면서 살면 욕쟁이가 도리어 욕을 안 하게 되며, 욕심쟁이들과 어울려 살았는데 그들은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으며,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한참을 돌아다녔는데 나중에 보니 어울리던 사람들이 다 착하게 바뀌어 버린다고 한다.


이렇게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은 주변을 이롭게 물들이는 사람이다.


물들까 봐 겁내지 않고, 물들지 않는 걸 능사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들과 섞여 어울리며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사람이다.


자기를 더럽혀서 더러운 때를 닦아내는 걸레처럼

스스로 걸레가 되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다.




내가 일평생 성찰하며 산다 해도


스스로 걸레가 되는 걸 선택한 마지막 4단계,

이사무애법계의 삶을 사는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충격의 여운으로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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