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천성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가족들을 위해 평생 동안 집안에서 살림만 하셨어.. 마음이 너무 아파"
지인이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의 슬픔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머니는 가족들을 서포트하는 게 가장 행복하셨기 때문에 일평생 그 생활을 유지하신 게 아닐까? 살림만 하시라고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그러자 지인은 슬픈 표정을 거두더니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하긴 우리 엄마 남 챙겨주는 거 좋아하시긴 해"
"원래 누군갈 챙겨주는 거에 보람을 느끼는 천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결국 사람은 자신의 천성이 이끄는 방향으로 살아가게 되어있거든"
월요일 점심시간, 대표님한테 물었다.
"대표님, 이번 주말에는 재밌는 일 없었어요?"
"저는 늘 그렇듯 집에서 일하고 쉬었어요"
"안 심심하세요? 매주 주말에 집에서 쉬면요"
"음.. 심심하죠.. 나가긴 해야 하는데 마음 맞는 모임이 없네요"
"안 심심하시잖아요 집이 재밌으니까 안 나오시는 거잖아요"
"맞아요. 사실 안 심심해요 요즘 독서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집에 있는 게 좋거든요"
마음 맞는 모임이 없어 할 수 없이 집에 있는 거라고 하시지만 애초부터 사람을 만나는 게 즐거운 천성이었으면 없는 모임도 만들어 나갔을 거다.
대표님은 독서에 끌리는 천성 때문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편안한 상태로 집에 있는 거였다.
오래된 옛 연인이었던 권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난 왜 친구가 없을까? 비지니스 관계 말고 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말이야"
"넌 돈 버는 이야기 제일 좋아하잖아. 오로지 친분만 쌓는데 시간을 쓸 수 있겠어?"
"하긴.. 돈 버는 이야기가 제일 재밌고 그런 주제 없으면 시간 아깝긴 해"
권도 친구를 만들 수 있었지만 실리적인 천성 때문에 벗을 두지 않는 거였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의 천성대로 살아간다. 본능적으로 가장 즐겁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방향을 향해 자석처럼 끌려가는 것이다.
천성은 취향이 되고, 가치관이 되고, 그것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천성의 색깔은 더 짙어지는데, 여러 경험들을 통해 가장 자신이 끌리는 방향을 알아내면 그 방향으로 고착화된다.
천성은 정말 무섭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성격이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천성은 어떻게 태어나자마자 정해지는 걸까?
윤회를 믿는 나는, 전생의 성격과 습관을 간직한 채 현생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천성이 이미 정해진 게 아닐까라고 '추측'해 본다.
억울하면 죽는 병을 앓고 있는 나의 천성으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전생에 만주벌판을 누비던 의병이었을 것 같다. 아니면 3.1 운동,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어딘가의 맨 앞에 서서 날뛰다가 가장 첫 번째로 총에 맞아 죽고 지금의 나로 환생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의 타고난 천성은 '불'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척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여자들은 절을 올리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도 할아버지께 왜 여자들도 후손인데 절을 올리면 안 되냐고 바락바락 대들어서 아빠가 말리던 기억이 난다. 이미 자아가 성립되기도 전에 불같은 천성이 툭툭 튀어나오는 거다.
이 천성은 삼십 대 중반에도 여전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대기업 사장님한테 다이렉트로 항의 메일을 보낼 정도로 할 말을 다해야 직성이 풀렸다. 상대가 아무리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아도 옳은 소리는 입 밖으로 내뱉어야 내가 살 수 있었다. 해야 할 말을 못 하면 불을 삼킨 듯 속이 뜨거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오랜 세월 나를 데리고 살면서 나의 천성을 분석해 본 결과. 불같이 화끈하고, 항상 흥미로움에 이끌리고, 한번 꽂히면 빠른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는 게 특징이었는데 마치 일렁일렁 거리며 어디로 옮겨붙을 지 모르는 불씨와도 같았다.
불의 천성은 장단점이 뚜렷하다.
장점으로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정말 빠르게 추진이 가능하다는 것과, 지 할 말은 다하고 사니 남한테 당하고 살 일이 없어서 야무지고 똑 부러진다는 소리를 듣지만
단점으로는 부당하다고 판단한 일에는 싫은 내색을 거침없이 내비치니 자칫 세련되지 못한 태도로 보일 수 있고, 열정이 과열되기가 쉬워 천천히 꾸준하게 밀고 나아가는 장기전이 어려울 때가 많다.
천성은 영원히 바뀌지 않으니 자신의 천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불같은 성질머리는 여전해도 이제는 버럭 화를 내기 전에 내 안에서 여러 차례 결재과정을 거친 후에 화낼만한 상황이라고 승인이 떨어져야 외부로 표출한다. 표출하는 방식도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고 논리 정연하게 텍스트로 정리한 후 메시지나 메일을 통해 상대에게 전달한다.
"으아아아아 빡친다!!!"
"자자 진정하시고 해당 안건에 대해서 화를 내도 되는지 판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왜 화가 나셨는지 설명해 보세요"
"제가 화가 난 이유는 그간의 부당함이 누적되어... 쏼라쏼라"
"사건이 부당하긴 하네요. 3일의 기간 동안 엄정하게 판결을 내려보겠습니다. 그동안 타인에게 불씨를 옮길 수 있는 위험요소가 다분하니 구속 수감하겠습니다"
"3일을 어떻게 기다리죠? 지금 당장 타오르고 싶어요 쿠오오오오!"
"어서 잡아넣어!!"
-3일 뒤-
"3일간 긴급회의를 거듭한 결과 화가 나는 안건에 대해 상대에게 이야기해도 좋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기다리느라 목 빠질 뻔했네요 지금 당장 퍼붓고 오겠습니다"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텍스트로 적어주시면 저희가 여러 차례 심의를 거쳐 매끄럽게 수정한 뒤에 상대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나는 어느새 나의 천성을 다루는데 달인이 되어있었다. 불씨가 커져 타인에게 옮겨 붙지 않게, 외풍에 의해 훅 꺼지지도 않게, 촛불처럼 은은한 형태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오랜 시간을 거쳐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가진 천성중에 가장 취약한 부분부터 보완해 나가야 완성도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의 타고난 성질부터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천성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1. 나의 취향을 관찰해야 한다 (천성이 끌리는 방향을 알 수 있다)
2. 나의 감정을 격해지게 만드는 버튼이 뭔지 알아내야 한다 (천성이 튀어나오는 패턴이 있다)
3. 주변인의 시선으로 비춰진 나의 특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각도의 내 모습을 알 수 있다)
4.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자신을 탐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온통 시선이 쏠려서 정작 자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지만 자신의 천성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태도를 교정할 수 있다. 정말 드문 확률로 개과천선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케이스다.
사람들은 내가 나이가 들고 차분하게 변했다고 생각하지만, 오늘도 나는 날뛰는 천성을 잡아넣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 판결을 내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