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베짱이의 고충
"MBTI가 뭐예요?" 남자가 턱을 괴며 물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다.
"좀 부끄러운 MBTI인데"
"뭔데요? 말해주세요"
"ESTJ가 되고 싶은 ENFP에요"
"오! 저 ESTJ인데"
"그래요? 부럽네요"
"근데 ENFP가 어떤 성향이에요?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잘 몰라요"
"계획성 없고 인내심 없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이고.."
"그래요? 어쩐지 그런 사람은 주변에 없어서 몰랐나 봐요"
남자는 개미 무리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베짱이가 없었나 보다.
[ENFP, 재기발랄한 활동가] 내가 싫어하는 모든 성향을 갖추고 있는 완벽한(?) MBTI다.
가장 취약한 단점으로는 한 가지 일을 반복적으로 하기 어려워하며 끈기가 없고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극한의 ENFP들은 성인 ADHD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데. 한 가지 일을 하다가 갑자기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하던 일을 마무리 짓기 어려워한다. 집중력이 떨어져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 중에 ENFP가 많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학교를 다닐 때 재미없는 과목의 수업은 집중하기 어려웠다. 나는 공부보다는 운동을 잘했고, 노래를 잘불렀고, 글을 잘썼고, 친구들이랑 어울리길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 좋은 것만 하는 베짱이 인간이었다.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런 산만한 내 모습이 너무 꼴보기 싫어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의 천성을 다듬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하기 시작한 건 메모하는 습관이었다. 매일 해야 할 일을 순서대로 메모하고, 스케줄표를 짜고, 잊지 않게 알람까지 맞춰두었다.
규칙적인 생활패턴도 하나씩 추가해 나갔다.
아침에 신문을 보고, 점심에는 계단 오르기를 하고, 저녁에는 글을 쓰는 루틴을 유지하면서 좋은 습관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조잘조잘 말 많은 푼수끼도 싫어져서 꼭 해야 할 말만 선별해서 했다. 최측근인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목소리 톤도 상당히 차분해졌다.
이렇게 나 자신이라는 거친 원석을 원하는 취향에 맞게 조금씩 세공하기 시작했다.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
회사 사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MBTI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의 MBTI를 듣더니 다들 깜짝 놀랐다.
"와.. ENFP였어요? 놀랍네요"
"서율씨 엄청 차분하시잖아요"
"내향적이실 줄 알았는데"
"계획적이고 일도 꼼꼼하게 하시던데"
1년 내내 함께 일하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놀라는 걸 보니 나도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나는 훨씬 더 정밀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성격이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MBTI도 변하지 않았을까?
다시 검사를 해봤더니 ENFP에서 끝자리만 바뀐 ENFJ로 나왔다. 인식형(P)에서 판단형(J)으로, 즉흥적인 인간에서 계획적인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와! 드디어 내가 계획적인 인간이 되었어! 인간은 개과천선이 가능하구나"
원하던 방향으로 성격이 변하다니, 검사 결과를 확인한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재검사를 해봤더니 ENFP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인간의 천성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나 보다. 나는 사회성이 정교해진 거지 천성이 변한 게 아니었다.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자신의 타고난 천성을 배척하고 싫어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 나는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내 이름 하나만 덩그러니 찍혀 나오는 완벽한 1인 가구로 살고 있다.
그동안 혼자서 진로를 정하고, 돈을 벌고, 자기 계발을 하고, 집을 구하고, 계약을 맺고, 결혼 상대를 찾고.. 인생의 모든 분야를 오롯이 홀로 판단하고 추진해야 했다.
조언을 구할 어른도, 기댈 동반자도 없으니
내가 내리는 판단은 곧 생계와 직결되었다. 정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면 삶의 질이 훅 떨어졌고 그건 순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ENFP에게 가장의 역할을 맡기기에는 너무나 불리한 부분이 많았다. 이 치열한 사회에서 계획성 없고 현실감각 떨어지는 ENFP가 꾸리는 집구석이 온전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던 거였다.
하지만 MBTI 검사만큼은 성격 검사가 아닌 천성 검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예리했다. 매번 내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베짱이를 끄집어와 내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는 개미인 척 살지만 태생 자체가 베짱이잖아! 절대 나를 속일 수 없어"
맞다, 나는 개미처럼 살고 싶은 베짱이였다.
사실 바이올린을 켜는 걸 더 좋아하는데도 개미들의 계획성과 생활력을 동경해왔다.
베짱이가 아무리 계획적으로 살아도, 두 계절이나 앞서 미리 식량을 모으는 개미의 역량에 미치지 못한다면 차라리 태생에 맞게 순응하여 사는 건 어떨까?
식량을 모을 시간에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바이올린을 기깔나게 잘 켜게 되고, 개미들 사이에 소문이 나서 유명세를 타면 공연을 열어 돈을 벌기 시작할 거고, 공연으로 번 돈으로 작곡을 공부하여 음원을 만들고, 앨범을 내서 저작권료를 따박따박 받았다면
비극적인 베짱이의 최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직도 내 MBTI를 부끄러워하지만
사실 나는 ENFP의 혜택을 톡톡히 받고 있다.
ENFP의 가장 큰 장점은 자유로운 사고, 창의력, 남다른 통찰력이다. 개미로 둔갑하여 다니던 회사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필수 재료이다.
대가리 꽃밭이라고 놀림받던 ENFP였기 때문에 머릿속에 다채롭게 피어있는 꽃들을 글로 풀어낼 수 있었고, 풍성한 글감들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본능을 거스르고 개미를 따라 하려는 베짱이보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재능을 똑똑하게 활용하여 식량을 모으는 베짱이가 더 롱런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처럼 노력하는 베짱이들을 위한
이솝우화의 또 다른 해피엔딩도 필요하다.
"개미들은 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려 식량을 모은 덕분에 겨우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베짱이는 여름부터 겨울까지 매달 저작권료를 받으며 마음껏 바이올린을 켤 수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