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26살,
대기업 건설사에서 일하던 시절 나는 본사에서 가장 나이도 어리고 짬밥도 없던 티끌 같은 존재였는데 나와 다를 바 없는 남자 사원과 함께 회식에 끌려갔던 날이었다.
그는 가장 낮은 신분인 죄로 소장님과 팀장님이 계신 절대 권력자들의 테이블에서 술 따르고 고기 굽는 도우미로 열심히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고기 굽기도 바쁜데 술까지 첫 번째 타자로 받아 마셔야 하는 최악의 자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절대 권력자들의 테이블에서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그는 소주를 딱 세잔 받아 마신 후 손에 집게를 쥔 상태로 앉아서 자고 있었는데 그 형상은 마치 부처와 같았다.
테이블에 엎드려 자거나 고개를 꾸벅거리며 조는 불완전한 인간의 자세가 아닌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처럼 90도 직각으로 허리를 펴고 벽에 기대어 양반다리 자세로 평온하게 눈을 감고 명상하듯이 자고 있던 것이다.
150g에 32,000원짜리 소고기는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그의 얼굴 위로 뿌연 연기가 휩싸였지만 평온한 부처의 얼굴과 콜라보되니 마치 신성한 구름과 같이 느껴졌다.
고작 소주 세 잔에 절대 권력자들과 타들어가는 소고기 앞에서 뿌연 연기를 온 얼굴로 맞으면서 완전한 OFF 상태로 잠이 든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아무도 그를 깨우거나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저 자식은 술을 진짜 못하나 봐? 어떻게 저러고 자냐"
"그러게요 어지간히 약한가 봐요 깨울까요?"
"아냐 자게 냅둬"
그가 부처 모드일 때 그에게 갈 술잔이 다 나에게 왔다. 원래 한잔 먹을 술을 그의 몫까지 두 잔씩 먹는 느낌이었다. 그날 그는 소주 세 잔을 마시고 꿀잠을 잔 뒤에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귀가했고 나는 집에 가서 역한 속을 비우느라 변기를 잡고 한참을 씨름했다.
여기서 그의 특권은 끝나지 않았다. 그날 그가 부처Show를 선보인 이후로 회식 때마다 그 앞에는 소주 대신 달달한 사이다가 있었다. 그는 고작 첫 회식에 알콜쓰레기 캐릭터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냐 하면 8년 전인 2013년도 당시 미개했던 기업문화에 심지어 건설사.. 군대 문화가 만연했던 회식에서 고작 술을 못한다는 이유로 여직원들 마저 강제 소주 파티에서 열외 되지 못했다.
2시간 내내 릴레이 건배사와 함께 원샷을 외치는 미개한 의식을 치르는 원시 부족들 사이에서 그는 홀로 소주잔에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달달한 사이다로 목을 축이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우리가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들을 구경했다.
길거리에서 오바이트를 하거나 비틀거리며 사경을 헤매느라 택시도 못 잡던 팀원들은 다음 회식에서 갖은 핑계로 술을 빼보려 해도 꼰대력으로 무장한 팀장 앞에서 전혀 먹히지 않았지만 그의 소주 세 잔 컷 부처Show는 단 한 번만으로 완벽한 열외 대상자가 되었다.
나는 경이로운 그의 생존능력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현장에서 관리 직원으로 파견되어 한 달에 한 번씩 본사로 올라와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결재판 첫 번째 사인란은 나의 몫이었다.
매달 내는 보고서인데도 매번 서류가 한두 가지는 빠져 있고 실수가 잦아서 그의 보고서는 유독 심혈을 기울여 체크해야 했는데 세 번째 실수를 찾아내며 슬슬 짜증이 날 무렵 그는 잽싸게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사 와 내밀었다.
아이스 바닐라 라테로 내 잔소리를 막아내 1차 고비를 넘겼지만 2차 결재자인 남자 대리가 서류를 보다 말고
"야 이 새끼야!!! 보고서가 이게 뭐야!!"라고 외치니
그는 헐레벌떡 뛰어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옙!!! 죄송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라며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을 연출했다.
이름만 불러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뛰어오는 오버 리액션과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아이스커피를 건네는 게 그의 주된 생존 방법이었는데 건설사에서 가장 좋아하고 잘 먹히는 인재상이었다.
그렇게 군기 가득한 이등병 이미지로 충분히 각인시킨 후 첫 회식에서 소주 세 잔에 갑자기 부처 퍼포먼스를 하니
"저렇게 바짝 군기 든 놈이 오죽 술을 못하면 그랬겠어?"라는 기적 같은 문장이 꼰대 왕 팀장 입에서 나왔고 매달 본사에 오면 당연하게 치러야 했던 지옥의 소주 파티에서 그는 벗어 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이미지가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캐릭터화 되면 엄청난 혜택이 따라온다.
나도 의도치 않게 생긴 캐릭터로 인해 혜택을 본 경험이 있다. 나의 캐릭터는 '택시비 요정'이었다.
건설사를 퇴사하고 난 후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는데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어 본 건설사 짬밥을 먹고 와서 그런지 나는 임원급 아래로는 편하게 대화가 가능한 만랩 사회인이 되었다.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 칼퇴를 하려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우리 팀 책임님이 오셔서 반갑지 않은 벙개 제안을 했다.
"이선임, 우리 오늘 한잔하러 가는데 낄래?"
"저는 예약제인데 너무 벙개 아닌가요? 오늘 컨디션도 안 좋은데"
"아 그러지 말고 한잔하러 가자 이책임이랑, 김책임이랑, 박책임이랑 갈 건데 어때?
"벙개 제안하시는 거 보니 잘생긴 총각은 따로 섭외되어있겠죠?"
"잘생긴 놈이 여기 어디 있어 한번 둘러봐봐 없잖아"
"휴.. 오늘은 몸이 안 좋으니 돌아가는 길에 택시비 지원해 주시면 참석하겠습니다. 여의도에서 저희 집 한 시간 거리인 거 아시죠?"
"콜! 택시비 지원해드림~"
그렇게 나는 책임님과 택시비 딜을 한 후 우리 팀 벙개 회식에 참석하였고 그 후 나는 택시비를 지원해 줘야 회식에 참석하는 인간으로 일파만파 소문이 났다.
"이선임! 이번 주 목요일에 팀 회식 있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어요"
"어허~ 강책임! 이선임 택시비 안 주면 회식 안 가는 거 몰라?"
내가 해명할 기회도 없이 나는 점점 택시비 요정으로 캐릭터가 고착화되었고
[회식에 이선임이 참석한다 = 택시비를 줘야 함] 이 공식은 팀 사람들에게 점차 세뇌되었다.
회식 자리가 마무리될 쯤에 기분 좋게 취하신 팀장님이 "아 맞다! 이선임 택시비 챙겨줘야지!" 하면서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를 내밀면
"팀장님 괜찮아요~ 아까 강책임님이 5만 원 주셨어요!!" 내가 손사래 치며 말하자
"어..? 강책임이 5만 원을 줬어?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하며 기어이 5만 원을 쥐어주셨고 매번 그런 식으로 회식을 한번 참석하면 5만 원~10만 원씩 현금이 생겼다.
어느 날은 옆팀 회식에 초대되어 참석한 적이 있는데 집에 갈 때쯤에 옆팀 팀장님께서 5만 원을 주시길래 깜짝 놀라서 손사래 치며 돈을 왜 주시는 거냐고 물었더니
우리팀 팀장님이 내가 옆팀 회식에 가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옆팀 팀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이선임을 회식에 부르려면 반드시 택시비를 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신 거였다.
마치 이름을 쓸 땐 빨간색 볼펜으로 쓰면 안 된다는 미신을 지키는 것과 같이 이선임이 회식에 오면 반드시 택시비 5만 원을 쥐어서 돌려보내야 한다는 이 공식은 내가 다른 팀 회식에 가있는데도 팀장님끼리 전화를 걸어서 알려줄 정도로 지켜져야 하는 룰이 되었다.
11~12월은 유독 환송회, 환영회, 연말 모임 등으로 회식 자리가 많았는데 한껏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주머니에서 자꾸 5만 원짜리가 나왔다. 지갑 대신 카드 홀더를 사용하는 나는 현금 넣을 데가 없어서 5만 원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잠들었다가 다시 출근하고 다음날 또 회식에 참석해서 집에 오면 주머니에 있는 10만 원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다음날 또 출근하는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는데 나중에 보니 테이블 위엔 5만 원짜리 신사임당 님들로 가득 쌓여있었다.
내 옆자리에서 일하는 우리 팀 남사친은 기가 찬다는 듯이
"야~ 이쯤 되면 너는 회식 가는 게 부업 아니냐? 대체 얼마를 번 거야? 이 정도면 택시비가 월급을 넘어서지 않냐?"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명분이 택시비지 이제는 '회식 출연료' 같았다. 나보다 집이 더 먼 직원과 함께 있어도 택시비는 나만 받았다.
다들 돌아가면서 5만 원씩 출연료를 지불하면서도 나를 회식에 부르는 이유는 내가 끼면 자리가 재미있었다.
피곤하거나 내키지 않는 날은 참석하지 않았고 그래도 참석해야 했으면 이왕 가기로 마음먹은 거 확실하게 놀았다.
외모는 "저는 술 못해요"를 끊임없이 시전 하거나 재미없는 아재 개그에 인상을 찡그리며 싫은 티를 팍팍 내거나 음식이 맛이 없다며 깨작거리는 새침한 이미지였지만
실상은 테이블 정중앙을 차지하고 앉아서 팀장님보다 더 말이 많았고 아재들의 재미없는 아재 개그도 나의 드립력을 더하면 꿀잼으로 살려낼 수 있었다.
나도 참.. 끼를 숨길 수 없는 외향형 인간이다.
택시비를 받고 집으로 편하게 돌아온 후 나는 항상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아메리카노와 베이컨 에그 잉글리쉬 머핀을 사들고 전날 택시비를 주신 분께 드리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이 과정 또한 하도 반복하다 보니 관례가 되어 우리 팀에는 공식이 두 개가 생겼다.
1. 이선임이 회식에 참석하면 택시비를 줘야 한다.
2. 택시비를 준 자는 다음날 아침 베이컨 에그 잉글리쉬 머핀과 아메리카노 조식 서비스가 제공된다.
지금 생각하면 왜들 그렇게 지켜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던 웃기는 관례였다.
그 당시 내가 어떻게 택시비 요정으로 캐릭터가 잡혔을까 생각해 보니 고기를 굽다 말고 부처 Show를 했던 남자 사원의 혁신적인 퍼포먼스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처럼
잘생긴 총각과 택시비가 준비돼야 회식을 참석하겠다는 나의 패기가 어지간히 그들에게 혁신적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