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는 열여섯 살 때부터 함께한 오랜 친구이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일을 챙겨준다며 저녁을 사주기로 했다.
약속 장소로 걸어가는데 y의 차가 보여서 탔다. y의 옆자리에는 그녀의 딸 연이도 앉아있었다.
"연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보라색 공주님 원피스를 입은 연이는 오랜만에 봐서 내가 낯설어졌는지 고개를 푹 숙이다 이내 새초롬하게 손인사로 화답했다.
"연이는 전남편한테 맡기고 저녁 먹으러 가자 여기 근처에 전남편 가게가 있어"
오늘은 y의 전남편이 연이를 봐주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y의 전남편을 정말 정말 싫어한다. 우연히라도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 Worst 10 안에 들 정도니까
7년 전 27살의 어린 나이에 y는 덜컥 임신이 되어 결혼을 했다. 불행히도 y의 남편은 부모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y와 아이를 방치한 채 매일 늦은 시간에 만취 상태로 귀가했고 새벽에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몇십만 원 단위의 현금을 ATM기에서 출금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 비틀대는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와서도 술이 부족하다며 기어이 술을 더 사와 들이키던 전형적인 알콜중독자였다.
처음부터 이 결혼을 반대해왔던 나에게 그의 존재는 친구의 인생을 말아먹은 철천지 원수였다. y가 임신 초기였을 때 나는 그녀를 카페로 불러내어 마지막으로 설득했던 날이 생각난다.
"누가 봐도 이 결혼은 헬게이트야 아기보다는 너의 인생이 더 중요하잖아.. 선택은 너의 몫인데 나는 네 미래가 훤히 보여서 친구로서 마지막으로 설득한다. 제발 냉정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사랑에 눈과 귀가 멀어버린 그녀에게 내 말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렇게 연이는 세상에 태어났고 예쁜 공주님이 되어 보조석에 앉아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런 연이를 보면 사랑스럽다가도 카페에서 y를 설득했던 그날이 떠올라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 미묘한 심정이 든다.
y는 전남편과 내가 마주치지 않게끔 나를 식당에 먼저 데려다 놓고 연이를 데리고 나가 맡기고 왔다.
"휴.. 살 거 같네"
연이를 두고 오자마자 그녀는 후련한 한숨을 내뱉으며 앉았다.
내가 고작 퇴근하고 약속 장소에 오는 동안 그녀는 퇴근하고 유치원에 들려서 연이를 픽업한 후에 집에 가서 연이 저녁을 챙겨주고 전남편에게 연락해 연이를 맡길 장소를 정하고 나서야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내 생일이라고 샤워도 새로 하고 예쁜 원피스로 갈아입고 왔다. 이렇게 번거로운 관문들을 거치고 나서야 저녁상에 함께 앉은 y가 나에겐 가장 귀한 생일선물이다.
y를 보면 살아 숨 쉬는 나의 과거 같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사람들에게 잊혀버린 나의 어린 시절이 모두 존재한다.
나 또한 y의 살아 숨 쉬는 과거다. 나도 그녀의 일대기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평소에 술을 많이 마셔도 아무 주사가 없는 내가 이상하게 y와 술을 마실 때만 자주 울곤 했다.
마치 나의 아팠던 과거와 마주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느낌이다. 그녀도 나를 보면 이런 느낌일까?
돌아보면 구불구불하고 험난했던 길이었지만 우리는 묵묵하게 여기까지 걸어왔다.
비록 도중에 이혼이라는 상처가 그녀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양육비도 제대로 보태지 않는 전남편의 몫까지 y 혼자서 감당하며 연이를 흥이 넘치는 밝은 공주님으로 키워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참 대견하다.
몇 달 만에 만나서 아직 할 얘기는 많은데 아쉽게도 벌써 식당 마감시간이 되었다.
연이를 다시 데리러 가야 해서 y는 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가게야? 오늘 쉬는 날이라며 연이 데리고 어디 좀 가지.. 지금 출발할 거야 연이 데리고 나와"
전 남편이 운영하는 선술집에 도착해 차를 대고 연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나는 보조석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애꿎은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그와 1초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가 가게에서 나왔는지 듣기 싫었던 그의 목소리와 한층 신이 난 연이 목소리가 들렸다.
y가 차에서 내려 연이를 데려와 태웠는데 연이는 못내 아쉬운지 창문을 열더니 있는 힘껏 외쳤다.
"아빠!!!"
"응 연이야!!! 잘 가!!"
"아빠!!!!!"
"응 연이야!!"
"아빠!! 보고 싶을 거야!!"
"아빠도 보고 싶을 거야 조심히가 연이야!!"
연이와 아빠는 이산가족처럼 멀찍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한참 서로를 바라보며 외쳤다.
y와 나에게는 회생 불가능한 인간 말종이었던 그가 연이에게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아빠니까
나는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외침이 희미해질 때까지 절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고 전남편도 내가 조수석에 타있으니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서 배웅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관계와 이 불편한 상황들은 모두 연이를 위해서인데 연이만 아무것도 모른 채 환하게 웃으며 창문 밖으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연이는 아빠와 헤어지고 나서도 기분이 좋은지 돌고래 같은 목소리로
"아빠가 토스트 해줬어! 쨈도 발라줘서 맛있었어"
"아빠랑 너무 재미있게 놀았어!"
"아빠는 정말 다정해"
라며 한참을 재잘거렸다. 그런 연이가 귀여워서 나도 돌고래 목소리로 물었다.
"연이 아빠 만나서 기분 좋았나 보네~ 아빠가 다정하게 해 줘서 좋아?"
"응!!! 아빠 너무 좋아 할머니도 다정해서 좋아"
"엄마는?"
"엄마는.. 무서워.."
운전하며 듣고 있던 y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엄마는 교관 스타일이지?" 라고 물었더니 연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연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렵다는 질문을 던졌다.
"연이야~ 아빠랑 할머니랑 엄마 중에 누가 일등이야?"
연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가 일등이고 아빠랑 할머니는 공동 이등이야"
"왜 엄마가 일등이야? 엄마는 무섭다며~"
"엄마는 내 옆에 있어줬어! 내가 애기일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나랑 함께 있어줬어 그래서 나는 엄마가 제일 좋아"
예상치도 못했던 연이의 대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가끔 만나서 맛있는 음식과 재밌는 놀이들로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잔소리 없이 다정하기만 한 아빠가 더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교관같이 무섭지만 매일 연이를 품에 안고 지켜왔던 엄마의 진심을 7살 어린아이는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연이에게 이야기했다.
"맞아 당연히 엄마가 일등이지~ 엄마는 정말 의리 있는 사람이니까"
무표정으로 운전하던 y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