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 오진으로 인해 브런치 장인이 되었다.

by 손서율



"고혈압이시네요, 약을 처방해 드릴까요?"


나는 방금 불치병 판단을 받아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인데 정작 말하는 의사 영감님은 무미건조하게 모니터를 보며 감기약을 처방하듯 이야기했다.


서른셋, 지극히 정상 체중인 내가 고혈압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혈압을 몇 번이나 다시 재봐도 130대였다. 회사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작년까지도 혈압은 항상 정상 범위였다.


고혈압 약은 한번 복용하면 평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약 처방을 거절하고 자연치유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삼십 대 초반에 고혈압이라니..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나는 참 특별한(?) 인생이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약국에 가서 혈행 개선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들을 샀다. 이젠 그렇게 좋아했던 와인도 끊어야 한다. 그러기엔 아직 살 날이 너무 많아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술을 끊고 영양제를 먹는 건 굳은 결심만 있으면 실행 가능했지만 문제는 매일 먹어야 하는 식단이었다.


한식은 고혈압 환자한테는 최악의 식단이다. 한식 중에서 가장 건강식이라고 평가받는 김치마저도 염분이 가득하다.


고혈압 환자의 식단은 저염식, 채소 위주, 고단백 식단인데 샐러드가 가장 적합했다.


처음엔 샐러드를 매끼 사 먹었는데 너무 비쌌다. 샐러드 전문점에 가면 배도 안 차는 샐러드 한 보울에 15,000원은 우습게 받았다. 그래서 직접 샐러드 재료를 사서 시판용 소스를 뿌려서 먹었는데 일주일 내내 먹다 보니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나는 평생을 질리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고혈압 식단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샐러드와 일반식의 경계에 있는 음식은 '브런치'였다.


예전엔 여자 친구들이 브런치 카페에 가자고 하면 질색했다. 빵 쪼가리 몇 개, 풀때기, 고기 몇 점 플레이팅에 삼만 원 돈이었다. 하지만 이젠 브런치의 존재가 참 고마웠다. 브런치 메뉴에 고혈압 식단을 접목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보통 브런치는 베이컨, 소시지, 팬케이크, 메이플 시럽이 주재료지만


나는 닭가슴살 소시지, 방울 양배추, 콜리플라워, 아스파라거스, 래디시 등을 주재료로 썼다.


새우, 콜리플라워, 양송이버섯, 방울양배추 등을 볶아서 래디시와 루꼴라를 곁들이고 수란으로 마무리한 건강한 홈메이드 브런치


브런치 재료는 대부분 수입 야채 전문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하였다.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하는 나란 인간을 모시고 사는 건 정말 고된 일이었다. 비위를 맞추려면 최대한 맛있게 만들어서 먹여야 했다.


이태리 식당에 가게 되면 샐러드를 꼭 시켰다. 드레싱을 먹어보기 위해서였다. 시판용 드레싱은 맛은 자극적인데 금방 물렸지만 이상하게 나와서 사 먹는 샐러드는 채소 한 점 남기지 않게 하는 고급 진 맛이었다.



◆ 고급 진 맛을 분석해 본 결과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 양상추 외 로메인, 루꼴라, 바질 같은 바다 건너온 외쿡 채소를 섞어야 한다.


2. 채소의 물기는 완벽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3. 최상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좋은 소금, 레몬즙을 섞어서 기본 드레싱을 만들어 버무린다.


4. 발사믹 식초를 섞는 대신, 완성된 샐러드에 발사믹 글레이즈를 마지막에 뿌려준다.



분석이 되자마자 백화점 식품 코너로 갔다. 최상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프랑스산 이즈니 버터, 트러플 소금, 트러플 오일, 발사믹 글레이즈, 그라인더 통후추를 샀다. 처음엔 돈이 많이 들었지만 몇 달 내내 매끼 이태리 식당에서 먹던 고급 진 샐러드를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 브런치 조리법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1. 아스파라거스는 올리브유에 볶아야 하는데 너무 숨이 죽으면 맛이 없다.


2. 방울 양배추는 4등분 해서 버터에 볶아 먹는 게 가장 맛있다.


3. 콜리플라워도 버터에 볶아 먹으면 진짜 맛있다.


4. 아보카도를 자를 때는 칼을 스치듯 썬다는 느낌보다는 일직선으로 내려 썰어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5. 새우는 손질이 다 된 냉동새우를 사면 되는데 크기가 커야 맛있다. 버터에 다진 마늘을 넣어서 볶아준다.


6. 루꼴라는 올리브 오일, 소금, 레몬즙 드레싱에 버무려 곁들인다.


7. 스테이크는 최대한 예열하여 연기가 자욱할 때 올려야 한다.


8. 수란을 만들 때는 최대한 물을 빨리 휘저어서 소용돌이 안에 정확히 달걀을 넣어야 한다.



직접 만든 브런치 (그릴드 야채, 호텔식 스크램블 에그, 아보카도 오픈 샌드위치, 토마토 부라타 치즈 오픈 샌드위치)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에 아스파라거스, 콜리플라워, 방울토마토, 메쉬드 포테이토를 가니쉬로 곁들였다.


고혈압은 나를 브런치 장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위기를 항상 기회로 만들긴 했다만 너무 장인이 돼버려서 내가 만든 브런치보다 맛이 없는 브런치 카페가 수두룩했다.


덕분에 나는 저염식, 채소 위주, 고단백 식단을 몇 개월 동안 질리지 않고 매끼 맛있게 먹으면서 유지할 수 있었다.


식단 외에도 자연치유를 위해 꾸준히 해왔던 노력이 있었는데 TV 건강 프로그램 고혈압 특집에서 대나무를 밟으면 혈압약을 먹지 않아도 자연치유가 된다는 실험을 하는 내용이 나왔고 실제로 효과를 본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 프로그램을 본 뒤 인터넷으로 대나무를 시켜서 집에서 TV를 볼 동안 매일 삼십 분 정도 꾸준히 대나무를 밟았다. 밟는 내내 완치되는 기적을 항상 기도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번엔 다른 병원을 찾았다. 그동안 간간이 혈압을 확인하긴 했지만 들쑥날쑥 이었다. 브런치 장인이 된 만큼 내 건강도 좋아졌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시 재본 혈압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어디 병원에서 고혈압이라고 한 거예요? 지금 나이가 겨우 서른네 살인데 이 체중으로 절대 고혈압이 나올 수가 없어요 제가 추측하기엔 스트레스 과다로 인해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일시적으로 혈압이 높게 나올 수 있어요 어떻게 혈압을 단 하루만 재보고 혈압약을 권유했는지 제 소견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요"


여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이야기했다. 알고 봤더니 6개월 전에 뵈었던 의사 영감님은 돌팔이였다.


돌팔이 영감님 때문에 화가 나기보다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었다. 신체가 건강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6개월 내내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만약 그때 내가 혈압약을 받아서 6개월 동안 복용했더라면 큰 문제가 생겼을 수 있겠지만 지난 6개월을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나에게 모두 도움이 되었다.



[고혈압 오진으로 인한 결과]


1. 브런치 장인이 됐다.


2. 술을 끊어서 간이 깨끗해졌다.


3. 식단 공부를 하면서 영양학 적으로 지식이 방대해졌다.


4. 6개월 내내 대나무로 꾸준히 지압해서 발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5. 건강 보조제를 더 열심히 챙겨 먹었다.


6. 건강하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추가로 작가의 길이 잘 안 풀리면 돈을 모아서 브런치 가게를 창업할 생각이다. 인생에 또 다른 길을 밝혀 준 것도 고혈압 오진이었다.




고혈압 오진으로 브런치 카페 창업이라는 새로운 길을 알게 된 것도


어렵게 이직한 직장이 나를 실망시켜서 작가가 된 것도


"위기가 한순간에 기회로 바뀌는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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