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니는 모른다.
너거들은 모른다.
너거들은 남편이 자상하니 잘 챙겨주니 알 턱이 있나!!!"
엄마가 이 말을 하셨던 날 엄마에게 우리는 딸이 아니라 같은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 여섯의 남자(사위) 중에 특별히 모나거나 아주 힘들게 하거나 밖으로만 돌거나 하는 그런 사위는 아무도 없었다.
대한민국 평균정도의 남자들이었고, 그냥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딸들에게 잘 살아 다행이다, 고맙다가 아닌 너희 남편들은 자상하고 잘 챙겨주니 니들이 어찌 내 맘을 알겠냐 화를 내뱉는 엄마에게 어쩌면 엄마는 우리가 딸이 아니라 여자로 보여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엔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을 쏟곤 했는데, 최근 엄마에 대해 회상하며 글을 쓰면서 사실 난 엄마에 대한 마음을 많이 내려놓고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글을 쓰면 쓸수록 엄마에 대한 아픈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와 내 맘을 흔들어 놓고, 깊은 생각에 빠지는 걸로 봐서 그것은 내려놓고, 무덤덤해지는 게 아니라 애써 누르고 감추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밥물 맞출 줄도 모르고, 콩나물국 하나 끓을 줄도 모르고 결혼 한 나는 신혼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엄마에게 전화를 했었다. 작은 것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랑 이야기하고 엄마의 조언을 들었다.
남편이 이것도 장모님께 여쭤봐야지, 몰랐는데 마마걸이였어라고 할 정도로 엄마말을 잘 따랐다.
엄마가 내게 빌려준 100만 원은 악착같이 챙기고 남동생에겐 5000만 원을 그냥 주는 일을 겪으면서 내 맘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틈의 깊이가 깊어져 내 맘을 힘들게 했다.
그런데 엄마가 우리를 딸로 보기보다 여자로 본다는 느낌을 받던 날, 한 여자에 대해 나도 생각하게 되었다.
2남 4녀의 맏딸.
남자인 오빠들 뒷바라지 위해 일찍이 공장일을 시작.
아버지는 한량.
어머니는 사랑 없이 맏딸만 의지.
동생들은 언니만 바라봄.
원가족 뒷바라지에 늦은 결혼.
잘생기고 공부도 많이 한 남편을 중매로 만남.
아들을 낳지 못하면 이 남자가 못생기고, 공부끈도 짧은 자기를 버릴까 봐 아들을 낳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결국 딸 여섯을 낳은 후 아들 낳기에 성공.
식구가 많아지니 당연히 할 일도 해야 할 것들도 너무 많음.
하루하루 힘겹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아냄.
딸들 다 출가시키고 나니 이제 본인 신세가 보이기 시작.
어린 시절 고생한 생각, 늘 남편만 바라보고 사랑을 구했으나, 자식들에겐 한없이 자상한 남편이 자신에게만은 아니었다는 생각.
화병이 남.
화내고 싸우고를 반복하면서도 늘 남편곁에서 떠나질 않음.
나를 좀 사랑해 주세요. 나를 좀 더 아껴주세요,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세요 하고 속삭이고 있으나 겉으론 모든 것을 화로 표현함.
잘 키워 시집보냈더니 딸들은 지들 사느라 바빠서 당최 연락도 잘 안 함.
내가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 시절만큼이나 평생을 사랑받고 싶어 하던 한 여자.
사랑받는 것에 익숙지 않아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여자.
몸이 부서져라 가족들 위해 살았는데 이제 남은 건 아픈 몸뚱이뿐이라 생각이 드는 여자.
남은 여생은 나를 사랑하면서 편안하게 사시라 말씀드리면 그게 뭔지를 모르기에 화부터 내는 여자.
내가 대학교를 갓 입학하고 따뜻함 무르익던 봄날이었다.
아빠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 같다며 엄마가 뒤를 밟기 시작했다.
아빠가 동네서 어떤 여자분과 차를 마시는 모습을 엄마가 봤다고 했다.
집은 난리가 났다
아빠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했고, 엄마는 맞다고 맞다고 했다.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날 엄마는 앓아누웠다.
그날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어두운 주방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는 아빠를 봤다.
나는 그날 일기장에 아빠도 엄마도 이해가 돼서 눈물이 난다고 썼다.
억척스럽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대하는 아내를 원하는 남편과 사랑표현에 서툴러 표현할 줄은 모르지만 한평생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사랑받길 원하는 아내.
나는 두 사람 다 이해가 됐다.
엄마이기 전에 한 여자였음을 인정하면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자 애써 외면하고 그냥 엄마만 바라보고 싶다.
미안해….
(엄마가 돌아가시면 난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