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분쟁의 기록
지구라는 행성의 이 작고 작은 땅에,
그것도 하필이면 1980년대에 가진 것도 없고 딱히 많이 배운 것도 기술도 없이,
마음만 여리고 약한 아버지에게서 나는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꿈꾸었겠지. 자신보다 나을 우리들의 삶을.
나의 어머니도 꿈꾸었겠지.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주방 부엌데기에서 해방되는 그날을.
그런데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
그저 삼시 세끼 굶지 않을 일자리에 감사하고.
조금 삐걱대지만 그럭저럭 일할 수 있는 몸뚱이에 감사하고.
아침은 거르고 늦은 저녁을 먹어가며,
그저 아이와 함께 웃을 주말을 바라보며 살아야지.
그리고 나의 부모와 똑같이 말하고 있지 않나.
우리 아이만큼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기를.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했었지.
나 또한 부모처럼은 살지 않을 것이라 했었지.
그런데 내가 뭐라고.
1980년대에, 대한민국의 가진 것 없는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난 내가 뭐라고.
아, 그런데 글쎄.
이런 일들이 비단, 나한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더라니까?
-2024년 6월 어느 날 배운의 일기-
23년 11월 9일
그날은 우리 엄마의 생신이었는데,
엄마는 우스갯소리로 그날 내가 잊지 못할 큰 생일 선물을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해의 첫눈을 보지 못했다.
나는 무슨 직감이 있었는지, 그 전날에
내가 아끼던 고급 니트며 옷들을 몽땅 꺼내 드라이 세탁을 했었다.
4박 5일만 있으면 된다던 병동 생활은,
눈을 들어보니 어느새 한 달을 넘겨 12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날의 사건 이후로 내 인생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상황으로 전개되었는데,
나는 그 와중에도 20여 년이 넘게 일했던 나의 커리어와,
한 학기 밖에 남지 않은 학교의 졸업을 걱정했었다.
오로지 그것에만 집착하여 무너진 내 건강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제발 좀 쉬라는 주변의 걱정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의료 사고로 3번에 걸친 수술을 받게 되고, 하필이면 운도 없게 0.4%의 확률인 후유증에 당첨되어 오른팔이 마비되고 말았다.
영구 장애, 혹은 1년 이상의 재활이 필요할 것이라 하였지만 주 5일에 걸쳐 하루도 빠지지 않은 독한 재활 덕분에 6개월 만에 신경은 거의 돌아온 상태가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다.
퇴원과 동시에 의료분쟁조정이 시작되었고, 이 또한 반년만에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나의 담당 주치의는 내 팔의 마비에 대해 누구보다 괴로워하였다. 그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고 몇 번이나 구두로 약속했었고, 내가 동의한 기억도 없는 2차 수술에 대한 수술비며 재활 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퇴원을 하고 병원을 찾아가자, 원무과에서는 분노에 찬 나를 어르고 달래며 수술비 반환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우선 재활을 통한 회복이 급선무라며 두 달여간의 재활을 지원해 준다고 하였다. 이 또한 내가 친구와 찾아가 격하게 항의하자 선심 쓰듯이 병원에서 제안한 사항이었다.
그리고도 결국 마비된 팔은 돌아오지 않자, 손사래를 치며 한 달의 재활을 추가로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팔이 돌아오지 않자, 병원의 원무과에서는 내 담당 도수 치료사를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었으며 더 이상의 지원은 해 줄 수 없다고 소리를 질러 나는 거의 내쫓기다시피 병원 치료를 중단하고 동네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의료 분쟁이 시작되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이혼까지 하게 된 나는 수중에 돈이 없었다. 변호사나 손해사정인을 선임할 수도 없었다. 정말 큰 보상을 바랐더라면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를 해치겠다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집도를 하는 의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진심을 다해 내게 사죄하고, 사후 책임을 다하려는 주치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한 행위는 환자의 최대한의 안전을 위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택한 수술 방법은 무모한 챌린지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른 병원과 여러 의사들의 진단을 통해 알았다. 수술 집도 시 디스크 제거를 결국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통증의 악화, 3번의 수술과 팔의 마비로 인한 퇴사...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한 책임을 한없이 물을 수는 없었다. 만약 나의 주관적 감정을 법정에서 다루기 시작한다면, 나는 이 때문에 회사까지 권고사직을 당하고 경제적 궁핍에 처해진 상황, 사서가 되겠다던 내 꿈의 좌절까지 고려해서 청구해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단지 객관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상식적인 수준을 바랐을 뿐이었다. 병원의 주치의가 약속했던 그 보상, 내게 도의적인 책임과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던 그 보상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로펌의 변호사를 통해 작성한 변론서에 쓰여 있는 것처럼, 내가 본의 아니게 대학 병원까지 실려가 3차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 그전에 의료 분쟁의 병원에서 받은 2차 수술로 인해 팔이 마비되고 통증이 지속되고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 그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보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반면 병원 관계자 모두는 분쟁에 나서는 환자를 모두 돈을 밝히는 적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잦은 폭력에 노출되었던 탓으로 커서도 아주 소소한 싸움과 폭언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그들도 역시 수많은 환자들과 각양각색의 민원에 지쳐 국소적인 시야에 갇혀 버리고, 환자를 그저 민원인, 돈만 밝히는 무지렁이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의료 보상의 심사과정에서 해당 병원의 관계자들은 제대로 나의 차트를 살펴보지도 않은 무성의한 타 병원 의사의 변론을 토대로, 이 사건을 대충 얼버무리고 보상 운운하며 일을 빨리 덮어버리려 했으며, 처음에 책임을 다 하겠다는 자세였으나 두 달 뒤 돌변하여 고압적인 태도로 나를 구걸하는 거지 동냥하듯 대하는 병원 관계자들의 기만적인 태도에 나는 의료 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돈도 백도 없었지만 나는 이 상황을 제일 잘 아는 당사자였기 때문에, 내 상활을 직접 변론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너무나 상식적인 문제에 상식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