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새로 태어나기 바빠
해가 기울어 간 것도 몰랐다.
살과 뼈
들끓는 나로 시를 살았다.
미완성으로 완성이다.
10대 때부터 어린 시인
아직도 어린 시인
그것 참 황홀하다.
- 시인의 말 -
나는 내 앞에 앉았다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왔다
어제 떠난 것처럼
너는 내 앞에 앉았다
스무 번의 봄날을 지나
아니, 서른 번의 겨울을 지나
나는 내 앞에 앉았다
너는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니
늘 함께 숨 쉬었으니
나에게서 걸어 나와
다시 내 앞에 앉은 것이다
시간 속에
쫓기며 쫓기며
너는 늘 나에게 속삭였다
네가 변하기 전에
내가 변하면 어쩌지
지금 네가 내 앞에 앉아 있다
나 너를 보낸 적도 없고
너 나를 잊은 적도 없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무엇일까
이 안개
비애라고?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는군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왔다
나는 내 앞에 앉았다
눈송이 당신
처음 만났는데
왜 이리 반갑지요
눈송이 당신
처음 만져보는데
무슨 사랑이 이리 추운가요
하지만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요
하늘이 쓴 위험한 경고문 같아요
발자국도 없이 내 곁에 온
하늘의 숨결
눈송이 당신
슬며시 당신을 좀 먹고 싶어요
당신의 눈부심을
당신의 차가움을 혀로 핥고 싶어요
이윽고 당신의 눈물과 함께
깊은 땅속으로 녹아들고 싶어요
인생
확! 살아 버려야 해
휙! 가 버리거든
허공에
쫘악!
눈부신 줄 하나 긋는
별
활 활 타며 사라지는
운석처럼
어둠이 내린 시각. 하늘은 까맣기만 합니다.
종일 하늘을 쳐다봤어요. 옅은 빛이든 밝은 빛이든 빛이 있는 시간 속에서 뭉게구름을 만났거든요. 어떤 구름은 우리 집 냥이를 닮았다가 어떤 구름은 푸들을 닮았다가. 형체를 바꾸며 그렇게 정처 없이 파란 허공 속을 떠돌고 있는 구름을 좇았습니다.
어떤 구름은 짙은 회색이었다가 어떤 구름은 눈처럼 하양이었다가 어떤 구름은 회색 쟁반 위에 올려진 솜사탕 같았다가. 그렇게 구름을 보며 하루를 채웠습니다.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는 2022년, 4년 만에 펴낸 '문정희'의 신작 시집입니다. 문정희 시인은 십 대 때부터 시를 썼고 그때부터 시인으로서의 삶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문정희 시인과 그의 시집을 처음 접합니다.
시집의 표제는 '눈송이 당신'이란 시의 문장에서 가져왔군요.
참 많은 시인들이 이 세상에서 언어를 담금질하는 시인으로 존재하는구나를 다시 느낍니다. 참 많은 시들이 불멸을 살지만 또 참 많은 시들이 태어나다 죽기도 하는구나를 다시 깨닫습니다.
저자가 시인의 삶을 산 지 오십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50년을 시인으로 살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한가 봅니다. 내성이 생겨버리고 익숙해져 버리면 시는 더 이상 탄생이 아니라 잉태되었다가 도태되어 버릴 테니까요. 문정희 시인은 그것을 늘 경계하며 시를 써온 듯 보입니다.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에 실린 시들은 시인의 고뇌가 뼈를 깎아 내는 피리 소리처럼 들렸거든요.
자신을 분리하는 분열자. 나와 내가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시. 그곳에 있는 나와 이곳에 있는 나는 동일 인물일까 다른 인물일까. 시를 읽으면서 새삼, 분리된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와 네가 하나인 것을 잊지는 않습니다. 시간과 세월이 만들어낸 시들의 탑은 늘 나와 네가 함께합니다.
일상 속의 나와 시인으로서의 나는 떨어졌다가 합체했다가를 반복합니다. 삶은 늘 같지 않기에 시들은 그 삶과 삶 사이의 공백에서 자주 고통스럽습니다. 시인은 그 공백 속에서 유랑을 하며 시를 건져냅니다.
시인의 숙명을 타고났을까요. 그의 시에는 한없는 비애와 슬픔들이 차곡차곡 눈처럼 쌓여있습니다. '슬픔은 헝겊이다.' 슬픔 없이 시는 어디에서 태어날까. 저자의 시들 속 문장들은 문득문득 그 시어의 여백에 우뚝 저를 멈추게 했습니다. 시인의 삶은 몹시도 고되구나...
때때로, '슬픔'은 삶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표지에 웃음을 담고 책 속에 슬픔을 담아 한 권의 나로 만들어지는 것이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주, 슬픔이 있어 다행이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들은 현실을 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위정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코비드 19의 현재에도 눈 맞춤을 합니다. 지금의 세태를 깊이 들여다봅니다. 시대의 질곡이 묻어납니다. 그것을 곡진하게 피력합니다. 무엇보다, 여성 시인으로서의 일상의 품을 떠날 수 없는 범인(凡人)으로서의 시들이 녹진하게 쓰여있습니다. 시가 삶이고 삶이 시인 시인.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갑고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미완성이 완성인 그의 시들이 앞으로도 쭉 잉태되고 태어나길 고대합니다.
어제, 산을 올랐더랬습니다. 진달래가 지천이었습니다. 나무냄새, 흙냄새, 꽃내음이 흐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말라고 진달래가 한껏 자신을 내어주기에 눈에, 사진에 담았습니다.
밤이 세상을 가득 채운 이 시각. 바람도 지쳤나 봅니다. 낮 동안 불어 젖히더니 밤과 함께 사그라진 걸 보면 말이지요. 바람도 쉼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어딘가에 자리를 펴고 곤히 저를 뉘고 잠을 청하고 있나 봅니다.
#문정희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