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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Nov 30. 2022

피임약에 대한 고찰

얘네가 맞고 우리가 틀린 부분

나는 생리통이 아주 심한 편이다. 학창 시절에는 때때로 양호실에 누워있기도 했고, 양호실 침대가 이미 만석인 날은 별 수 없이 교실 내 자리에 엎드려 낑낑대곤 했다. 회사에서도 생리 기간에는 매일 진통제를 몇 알 씩 먹는 게 당연했고, 너무너무 힘든 날은 휴게실에 잠깐 누워있기도 했다.

당시 누군가가 “애 낳으면 생리통 다 없어져.”라는 말로 나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었는데, 애를 둘이나 낳은 지금도 생리통이 없어지기는 개뿔, 완화조차 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나는 여행 계획을 잡을라 치면 제일 먼저 생리 기간을 따져보고, 여행 기간과 겹칠 것 같으면 1~2주 전부터 미리 피임약을 먹어서 생리 예정일을 뒤로 미루곤 했다.

“하루 이틀만 참으면 되는데, 호르몬제 몸에 좋지도 않을 테고. 그냥 먹지 말지 그래. “

라고 조언하는 친구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진통제를 먹기만 하면 활동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먹어봤자 '조금 덜 아프다' 정도라, 모처럼의 여행에서 중병환자 같은 에너지 수준으로 돌아다니거나 일정을 망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에 내 상비약 리스트에는 언제나 피임약이 들어있었다.


이곳에 온 지 일 년쯤 되었을까, 가족 여행을 앞두고 피임약이 다 떨어졌다. 한국에서는 약국에서 상비약으로 판매되는 품목이었기에 여기도 그러지 않을까 하고 동네 약국에 가 보니, 응급 피임약(사후 피임약)만 있고 내가 찾는 일반 피임약은 없었다. 한국은 응급 피임약이 의사의 처방 대상이었는데, 여기는 반대로 매일 복용하는 일반 피임약이 처방전 없이는 구매할 수 없는 품목이었던 거다.



아이들을 데리고 소아과며 치과, 정형외과, 안과, 피부과까지 각종 병원을 처음으로 가야 할 때마다 '미션'을 클리어하는 심정이었는데. 새로 여성의학과/산부인과 병원을 찾아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잠시 눈앞이 캄캄했다.

이곳에서 새로 병원을 가려면 일단 근처의 '여성병원' 혹은 '산부인과' 같은 식으로 내가 진료가 필요한 과목을 검색해서 나오는 곳을 찾은 다음, 해당 병원에 전화해서 내 보험이 받아들여지는 곳인지 아닌지부터 확인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여행지에서 열이 좀 나거나 가벼운 상처를 입더라도 근처에 있는 아무 병원에나 가서 보험이 적용된 가격으로 쉽게 진료를 볼 수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곳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사실 보험 적용 여부를 사전 체크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은 아닌데, 영어로 하는 전화(얼굴을 보지 않고 하는 의사소통은 왠지 더 어렵게 느껴진다.)에 대한 부담과 당일에 일처리가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을 예약해서 진료받고 처방약이 내 약국에 준비되기까지 적어도 하루 이상, 어쩌면 며칠이 소요된다는 점이 너무나 번거롭고 귀찮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고, 피임약이 필요한 사람이 전화를 해야지.


나는 집에서 25분쯤 떨어진 Family Medicine에서 부인과 진료를 하는 의사를 찾아 가장 가까운 날짜로 예약을 하고, 진료를 받고 피임약을 처방받았다.

이곳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하게 한국보다 전산화가 더 '쿨하게' 된 것이 이 약 처방인데, 병원에서 처방전을 출력해 환자 손에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지정한 약국으로 온라인으로 전송해 준다. 그럼 병원에서 나온 환자가 약국으로 바로 가면 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내 약이 준비되기까지 짧게는 몇십 분이 걸리지만, 때로는 며칠이 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그래서 환자가 처방전을 들고 가게 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전송해, 약국 방문 횟수를 한 번 줄여주는 것이다.) 약이 준비되면 약국에서 문자나 전화로 알림을 보내주고, 그때 찾으러 가면 된다.

Dr. Darcy는 나에게 3개월 치를 한꺼번에 받아갈 수 있도록 처방해 주었는데, 이 3개월분이 떨어지면 병원에 다시 올 필요 없이 약국에 전화만 하면 또 3개월 치를 받을 수 있는 'Prescription Refill'도 향후 1년간 3번 더 가능하도록 조치해 주었다. 1년 후에는 병원에 다시 와서 검진도 받고, 지속적으로 약 처방도 받으라고 했다. 나처럼 심한 생리통을 겪는 사람은 필요할 때 잠깐씩 뿐 아니라 상시적으로 피임약을 먹는 것이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생리를 하고 싶지 않으면 몇 개월 동안 쭉 연달아 약을 먹어서 생리 횟수를 줄이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약국에서는 2일 후에 약이 준비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피임약을 한 달에 일주일 씩 간격을 두지 않고 그냥 쭉 먹어서 생리를 몇 번쯤 건너뛰어 버려도 된다는 이야기는 생리를 25년 넘게 하고 애를 둘이나 낳고도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나의 몸에서 매달 일어나는 일에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는지 다소 어이없는 기분이 드는 동시에, 피임약 처방을 받으러 가길 잘했다 싶었다. 피임약에도 몇 가지 브랜드가 있는데 왠지 내 체질(?)에 맞는 걸로 처방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묘한 신뢰감까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일반 피임약이 처방약이고 응급 피임약이 OTC(Over the counter, 약국이나 마트 상비약 코너에서 구매할 수 있는 일반약)인 미국의 방식이 일반 피임약이 OTC이고 응급 피임약이 처방약인 한국의 방식보다 더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 피임약은 말 그대로 ‘응급’ 상황에 먹어야 하는 약이다. 최대 72시간 이내에 복용하도록 되어있지만, 72시간 이내라도 시간이 늦어질수록 효과가 매우 가파르게 감소한다. 가장 확실한 효과를 위해서는 24시간 이내에 첫 번째 복용을 해야 한다(응급 피임약은 12시간 간격으로 두 번 복용하는 고농도의 호르몬제이다.). 한국에서 응급 피임약이 처방약으로 판매되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급한 상황에서 언제 병원을 들렀다가 약을 사. 일단 최악의 상황부터 막아놓고 봐야 하지 않아?’

하는 의문이 들곤 했었다. 이유를 찾아본 바로는 “고농도의 호르몬제라서 반드시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쎈’ 약인만큼 다소간의 부작용이 있기는 하겠지만, 메스꺼움이나 생리주기 변동, 부정 출혈 등이 원치 않는 임신의 위험보다 중요하거나 못 견딜 일도 아닐 텐데. 미국에서 일반약으로 판매될 수 있는 안전 수준의 약이 우리나라에서는 왜 일반약으로 판매되지 않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응급 피임약 브랜드는 ‘Plan B’이다. 참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메인 카피도 “I‘ve got plan B.(나는 대비책이 있어)”이다.

성폭력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물론이고, 성관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치 않는 임신의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 완벽한 피임법은 아직 없고, 가장 많은 임신 중절은 어떤 이들의 상상처럼 ‘문란한 성관계’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혼 부부의 가족계획에서 일어난다. 응급 피임약이 OTC로 판매된다고 사람들이, 특히 임신의 당사자가 되는 여성들이 옳다구나 하고 문란한 성관계를 즐길 것이라는 것은 어이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어떤 여성들이 문란한 성관계를 즐긴다고 해도 그것이 응급 피임약의 판매를 처방약으로 판매함으로써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애초에 ‘막아야 하는’ 뭣도 아니라는 이야기까지는 여기서는 하지 않겠다.)

이유야 뭐가 됐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혹은 원치 않는 임신의 위험이 있을 때 응급 피임약은 ‘커지면 가래로 막기도 힘들 일을 호미로 막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호미로 막을 수 있을 때에 맞추려면 OTC로 판매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다소 쓸데없는(?) 애국심이 발동하여 우리나라에서 적용되는 방식/시스템/법 등이 안 좋은 것 같은 부분이 보여도 순순히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일반 피임약과 응급 피임약의 처방전 필요 여부는 얘네가 맞고 우리가 틀린 것 같다.


*Header Photo by Reproductive Health Supplies Coaliti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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