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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Oct 04. 2021

딸기, 복숭아, 귤

왜 자꾸 과일에 뭘 얹어 먹어?

미국은 정말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나라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논도 넓고, 밭도 넓고. 차를 몰고 지나가다 보면 슬렁슬렁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보이는데, 저 소 한 마리에게 주어진 목장 면적이 한국에서 내가 살던 집보다 넓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대륙 하나를 거의 통으로 차지하고 들어앉은 나라이니, 나지 않는 곡물이나 과일이 대체 있긴 한가 싶다. 석유도 많이 나고, 해양 자원도 풍부하다.

텍사스는 특히 물가가 안정적인 편이어서 한국보다 포도도 더 싸고, 체리도 흔하고, 바나나는 완전 저렴하고, 수박은 1/3 가격도 안 하는데 씨도 없고 맛있는 등 진짜 가끔은 좀 질투가 날 정도로 대부분의 과일이 저렴하고 맛있는데, 와중에 한국 과일보다 맛이 떨어지는 것이 딱 3가지 있다- 바로 딸기, 복숭아, 귤이 그것이다.

그런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세 가지가 딸기, 복숭아, 귤이라는 것이 조금 문제라면 문제겠다.



이곳 딸기는 한국 딸기보다 훨씬, 정말 훨씬 단단하고 신 맛이 강하다. 처음 이 동네 딸기를 먹어보고 그 맛없음에 너무 당황해서 나 혼자 연구 아닌 연구, 고민 아닌 고민을 했더랬다.

'땅이 넓어서 유통 목적으로 과육이 단단한 품종을 선호하는 걸까? 빵이고 쿠키고 어금니 쪽이 아릴 만큼 달달한 크림을 몇 cm 두께로 발라 먹는 애들이 과일은 좀 산미가 강한 걸 좋아하는 게 영 이상하단 말이야. 절임이나 잼으로 만들면 이쪽이 더 맛있게 되나?'

그런데 교회에서 만난, 80~90년대에 이민 오신 분들이 미국 딸기가 더 맛있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다.

"아니에요! 한국 딸기가 진짜 세계에서 제일 맛있어요."라고 했더니 나보고 애국자라며 껄껄 웃으셨다. 아닌데, 진짠데. 러시아에서는 우리나라로 '딸기 먹기 관광'을 오는 상품도 있다는데.

<작은 아씨들>이나 <산딸기 크림 봉봉> 같은 책에서 미국 애들이 왜 딸기를 생크림이나 설탕에 찍어먹는지 궁금했는데, 얘네는 크림 설탕 없이도 달달하고 말랑말랑한 딸기를 먹어본 적이 없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Photo by Heather Ford on Unsplash


왜 20~30년 전 이민오신 분들은 미국 딸기가 더 맛있다고 하시는지 궁금해서 자료를 좀 찾아보니, 내가 맛있어하는 '설향', '죽향' 등의 한국 품종들이 개발된 것은 거의 200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 한다. 아직까지는 미국에 이 품종들이 널리 퍼지지 않은 걸까? 아마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있겠지만, 일단 한국 딸기 씨앗을 문익점 선생님처럼 붓 뚜껑에 담아 들여와 우리 집 뒷마당에만이라도 심고 싶을 지경이다.


복숭아는 Nectarine과 Peach로 나뉘는데, 전자는 소위 '딱복'이고 후자는 '물복'이라고 보면 된다고 한다. 물복파인 나는 Peach를 골라 샀는데, 어라, 딱딱하다. 내가 잘못 알았나 싶어 Nectarine이라고 된 것도 사 봤는데, 음, 더 딱딱하다. Peach가 물복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그런데 Peach도 한국 물복만큼 말랑하지 않고, 달콤하다기보다 새콤하다. 다시 나만의 '미국 과일 미스터리'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땅이 넓어서 유통 목적으로 과육이 단단한 품종을 선호하는 걸까? 빵이고 쿠키고 어금니 쪽이 아릴 만큼 달달한 크림을 몇 cm 두께로 발라 먹는 애들이 과일은 좀 산미가 강한 걸 좋아하는 게 영 이상하단 말이야. 절임이나 잼으로 만들면 이쪽이 더 맛있게 되나?'

미국에서 시작된 것인지 유럽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숭아에 얼그레이 차(茶) 가루를 뿌리고 마스카포네(Mascarpone) 치즈를 얹어 먹으면 딱딱하고 밍밍한 복숭아도 꽤 맛있게 변하기는 한다.


마지막으로, 귤. '만다린 오렌지'라고 부르는 이 동네 귤은 대체로 단단하고 껍질이 두꺼우며 단 맛보다 신 맛이 강하다. 그래도 딸기나 복숭아보다는 높은 확률로 맛있는 귤-말랑말랑하고 껍질이 얇고 단 맛이 강한-이 아주 가끔 얻어걸리기도 하지만.

아, 텍사스 사람들에게 제주도산 귤을 좀 먹여주고 싶다. 그럼 당장 이 종(種)을 수입해 오라는 민중의 요구가 빗발칠 텐데. 캘리포니아 쪽에는 한국 귤이 있으려나.

다행히  동네 오렌지는 맛있지만, 오렌지는 귤을 대체할  없다. 오렌지는 먹으려면 칼을 써야만 하니까.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읽으면서  개씩 까먹으려면  따위는 필요로 하면  된다.

시럽에 절인 과일 타르트 위의 귤은 맛있지만, 음, 시럽에 절였는데 맛이 없으면 이상한 거지.



생크림을 찍고, 치즈를 얹고, 시럽에 절이면 보기에는 훨씬 예쁘고 뭔가 동화책에서 본 듯한 모양새가 되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왠지 '본연의 맛으로 먹는 건강한 과일'이 더 이상 아니게 되는 기분이다. 그래서 텍사스에서 우리 가족이 주로 먹는 과일은 포도, 바나나, 수박 등이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아니어서 우리 집 '과일 조달 및 재고 관리 담당'은 남편이 되었다는 흐뭇한 결론. 하긴, 뭐든지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법이다.


텍사스만 이런 것인지, 동부나 서부, 혹은 한국인들이 좀 더 많이 사는 도시는 다를지 궁금하다. 지금 같아서는 딸기와 복숭아, 귤이 한국만큼 맛있는 동네가 있다면 이사까지는 무리겠지만 여행이라도 가고 싶을 정도이므로.


*Header photo by Jennifer Palli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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