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지 Mar 02. 2022

소수자(Minority) 감수성

아마도 몰랐을, 하지만 알게 되어 다행인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카운티(County - 미국 등에서 사용하는 자치 행정 조직의 단위. 우리나라의 군(郡)과 성격이 비슷하다)의 아시안 비율은 약 20%로, 텍사스에서는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인도, 베트남 계 인구가 가장 많은 편이고, 그다음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중국인. 한국인은 소수 중에서도 소수에 불과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청소년 이하 세대들에게 BTS가 국위를 엄청나게 선양하기는 했지만 한국이라고 하면 "North or South?"라고 묻거나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을 가장 먼저 언급하며 한국에 대해 '들은풍월이 있음'을 표현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최근에는 넷*릭스 등의 플랫폼을 통해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오, 스퀴드 게임!”등을 외치며 엄지 척을 하는 경우도 퍽 늘었지만, 아무튼 이곳 사람들에게 한국은 몇 번 들어본 적도 없고 낯선, 변방의 작은 나라일 뿐인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 가족은 그러니까 소수자(Minority)이다. 다행히 아직까지 큰 불이익을 당하거나 모진 설움을 겪은 경험은 없지만, 일상 속에서 늘 '소수자 감수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늘 주눅 들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대놓고 차별을 당하는 일은 드물지만, 때때로 시선이 집중됨을 느끼고 자기 검열을 하게 되며 '아, 나는 여기서 가정하는 기본 인간의 형태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실감하는.


사실 한국에 살 때도 우리 가족 구성원 중 나에게는 이 '소수자 감수성'이 넘쳐났었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별은 한국 사회가 규정하는 기본 인간형이 아님을 싫어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던 수없이 많은 이유 중 얼른 생각나는 몇 가지만 들어 보면 이러하다.

신입사원 동기들과 회사에 입사해 인력팀에서 나누어 준 규정집을 읽어보던 때였다. 모두가 가장 관심 있었던 부분은 당연히 '휴가'에 관한 부분이었다. 누가 결혼을 하면 유급 휴가가 며칠, 출산을 하면 며칠, 누가 칠순이 되시면 며칠,... 쭉 읽어나가고 있는데, '빙부모 상(喪)을 당하면 6일'이라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빙부모는 장인 장모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당시 회사는,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이었음에도, 2005년 말까지도 사원들을 '남성'으로만 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청에 의해 그 후 '배우자의 부모 상'으로 용어가 변경되었다.)

우리 부부가 아이에게 나의 성(姓)을 주기 위해서는 부부가 '합의’를 해서 이를 혼인 신고서에 표시해야 했다. 동등한 조건에서 둘 중 하나의 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기본은 남편의 성인데 내 성을 물려주려면 '특별히' 합의와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절차도 방법도 없던 시절보다 세상 좋아졌지 않느냐"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특별히' 나의 성을 물려주면 아이들은 원치 않는 억측이나 구설에 휘말릴지도 모를 일이었고, 내가 100% 책임질 수는 없는 아이의 인생에 행여 힘듦을 얹어주게 될까 봐 나는 결국 내 성 물려주기를 포기했다.

결혼 이후 느낀, 사위 대접과 며느리 대접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신문 기사에서 남성은 그냥 '김 모 씨(56)'로 표기되고 여성은 '김 모 씨(여·56)'로 표기되는 것을 볼 때마다, 남의사/남가수/남배우/남대생이라는 표현은 거의 볼 수 없고 어색한데 여의사/여가수/여배우/여대생이라는 말은 너무나 흔하고 자연스럽게 들릴 때마다, '인간형의 기본'은 남성이라고 온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분을 나타낼 때 '여' 한 글자 더 붙는 게 무슨 대단한 불이익이라도 되냐고, 성씨 물려주는 게 뭐가 대수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남성이었다. 중요한 것은 한 글자가 더 붙고 안 붙고나, 성씨 물려주고 못 물려주고가 아니라고(내 성을 물려준다 해도 그 역시 나의 '아버지'의 성이다.), '세상에서 나도 당신과 같은 무게와 중요도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없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대답했지만,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박완서 님의 글이 있다.


이를테면 팔자가 좋은 여자들에겐 여성운동이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다. 자기는 그렇게 날치고 떠들지 않아도 충분히 남자와 동등한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과 오만 때문이다. 자기가 하기 나름으로 남자와 동등한 사람대접을 받을 수도 못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 여성운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은 아주 그럴듯하다.
...(중략)... 옛날 옛적, 사람 밑에 종이라는 족속이 따로 있었을 적에도 주인을 잘 만나 사람대접을 받는 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 명의 종 중 아홉 명이 주인과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학문을 익혔다고 해도 단 한 명의 종이 다만 종이라는 이름으로 박해받는 게 정당한 사회에선 그 아홉 명의 종이 단지 특혜를 받고 있을 뿐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고는 못할 것이다. 특혜란 정당한 권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걸 베푼 쪽에서 언제 빼앗아가도 말을 못 하게 돼 있다. 팔자가 좋은 여자도 팔자 사나운 여자의 고통에 동참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 박완서,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중에서


"열 명의 종 중 아홉 명이 주인과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학문을 익혔다고 해도 단 한 명의 종이 다만 종이라는 이름으로 박해받는 게 정당한 사회에선 그 아홉 명의 종이 단지 특혜를 받고 있을 뿐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고는 못할 것"이라니. 이보다 명쾌하게 소수자 문제를 비유해 낼 수 있을까.


2년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대낮에 길에서 목 졸려 사망한 일이 있었다. '백인이었다면 경찰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흑인이라서 죽은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고,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해당 경찰의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이 연일 뉴스에 보도되었다.

2016년 5월, 김성민이 소위 '강남역 살인 사건'을 일으켰을 때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번화가에 위치한 건물에서, 나와 원한 관계는커녕 일면식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단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 나를 공포에 떨게 하기 충분했다. 다음날 출근길에 지하철역에서 새로 나온 커피 제품을 샀는데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맛있어서 '오, 득템 했네.'라는 생각을 한 다음 순간,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 여자분은 이런 신상 커피도 이제 못 마시네... 이렇게 그냥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죽은 거 아니야. 나도 이 커피가 내 마지막 커피가 될지 모르는 거 아니냐고.’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것도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소리를 내며 터지는 눈물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다'라고 느꼈던 그때의 무력감과 공포가 생각나 '흑인이라서 죽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 앞에서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뉴스를 보며 펑펑 울었다.


아무리 흑인 중에 백인보다 유명하거나 부자인 사람들이 많아도 단 한 명의 흑인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이라면 당하지 않을 죽음을 당하는 세상이라면 여전히 평등하다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옛날보다 여자들 세상 살기 좋아졌다" 해도 일상에서 남성을 인간의 기본형으로 가정하고 여성들은 '요구'하거나 '합의'해야만 한다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죽는 일이 벌어진다면, 여전히 평등하다고 할 수 없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는 로컬(local) 영화제"라고 미국인들의 '미국 지구 중심설'에 가벼운 펀치를 날린 것이 한동안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한국계 미국인 배우 샌드라 오는 봉 감독의 통역을 맡았던 샤론 최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봉준호 감독은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불리한 상태에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는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다."

최 감독은 이를 "봉 감독은 소수 집단의 일원이었던 적이 없다(He has never been a part of the minority).”라고 표현했다. 오 배우는 봉 감독의 당당함-이유 없이 주눅 드는 경험이나 끝없는 자기 검열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오는-을 자기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이 인터뷰에서 "소수 집단이었던 적이 없다"는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그렇구나. 소수 집단에 속해 본 적이 없구나. 여성이라는 소수 집단에 속해 평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절대 모르는 감정선(線)이, 알 수 없는 세계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만난 많은 이민 가정에서 남성들은 자녀들의 교육기가 지나고 나이가 들면 대체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하고, 여성들은 평생 여기서 살고 싶어 한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노년의 의료비 걱정이나 본능에 가까운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도 있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면서 ‘위상이 더 크게 하락하기 때문’도 크다. 여성들은 여기서 아시안으로 사는 것이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비해 크게 어렵거나 서럽지 않다,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오히려 여기서의 삶이 더 낫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한국에서만 계속 지냈다면, 나의 아이들 역시 아마도 '소수자였던 적이 없는'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다. 인생을 끝까지  수야 없는 일이지만 지금까지로 봐서는 아마도 이성애자, 비장애인, 부자는 아니어도 극심한 가난으로 고생하지는 않는 생활을 했을 것이다. 거기다 남성. 군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부분만  극복하고 나면 한국 사회에서 '인간의 기본형' 대접을 받으며  불편 없이 살았겠지. 그리고 아마도 나의 '소수자 감수성' 공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르지만, "엄마가 너무 예민한 거야." 따위의 말을 해서 나를 분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곳에서 지금 소수자로 살아간다. 작은아이는 아직 별 말이 없지만, 큰아이는 중학교에 가더니 인종 차별적인 표현을 '악의 없이' 쓰는 아이들도 가끔 있다고 했다. (나는 사실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같은 학교 학생을 악의 없다고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냥 두었다.) 한국인이 극히 드문 환경 속에서 자기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한국인을 대표하는 듯이 보이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해석되는 것의 불편함과 부담감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다. 식당이나 거리에서 '배려'한답시고, 아시아 문화를 '존중'한답시고 하는 행동이나 이상한 인사에 묘한 불쾌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 속에서 아이가 크게 상처받는 일은 아직까지 다행히 없었고 앞으로도 가능한 한 없기를 바라지만, 이런 경험 자체가 아이에게 독(毒)이 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경험하지 않고도 타인의 아픔을 잘 공감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모르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사람들은 더 많다.

“몰랐다."

라고 바로 인정하고 개선하면 다행인데,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닌데 왜 상처받냐. 네가 나를 나쁜 사람 취급해서 오히려 내가 상처받았다."

라고 되려 억울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본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악의 없이 하는 말에도 누군가는 찜찜하고, 기분 나쁘고, 배제되고,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어렵다.

소수자로서의 경험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한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이 경험이 나중에 아이들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소수 집단-자신이 속하든 속하지 않든-의 사람들과 더 잘 연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다면. 글쎄, 나는 시원하게 김칫국을 들이켜는 셈일까.



*Header Photo by Duy Pham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