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선진국이라면서요
목요일이다. 평소 같으면 이제 하루만 버티면 주말이구나, 하고 평화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있겠지만 나는 지금 마음이 바쁘다.
오늘 밤부터 다음 주 월요일까지, 며칠간 최저 기온이 화씨 24~27도(섭씨 영하 2~4도)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낮 기온은 영상으로 올라갔다가 밤에는 다시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가 한 며칠 계속될 거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나는 1층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보리차를 잔뜩 끓여 놓고, 아직 식기와 세탁물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지만 미리미리 식기세척기와 세탁기를 돌리고 있다. 이따가는 쌀을 씻어 밥도 조금 해 둘 예정이다.
남편은 스프링클러를 잠그고, 집으로 들어오는 수도관이 얼지 않도록 수건을 감고 비닐로 칭칭 감아두었다. 어제 산책을 하다 보니 수도관에 전용 커버 같은 것을 씌운 집이 있길래, 이따 가게에 가서 비슷한 게 있으면 하나 사 오겠다고 한다.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낮까지 영하권에 머무는 것도 아닌 고작 이 정도의 날씨에 우리 부부가 겨울잠을 준비하는 설치류처럼 바쁜 이유는 작년 겨울의 경험 때문이다.
작년 2월 14일 일요일. 30년 만인지 200년 만인지 말은 분분하지만 아무튼 엄청난 추위가 온다는 뉴스에 온 텍사스가 긴장하고 있었다. 이 동네의 집들은 애초에 영하의 날씨를 상정하고 지은 집들이 아니다. 외관에 있는 벽돌 무늬는 그야말로 무늬이고 얇은 나무판과 그 속의 얇은 단열재를 경계로 바깥과 안을 구분할 뿐, 이중창 하나 없다. 집에 지하실이 없어 수도관이 마지막에 각 집으로 배분될 때는 지상 30센티미터쯤 높이로 빠져나와 외벽에 구멍을 뚫고 연결되니, 외부로 드러나는 부분이 반드시 생긴다. 물론 단열재를 감아놓기는 하지만, 끝까지 지하로 연결되는 것보다야 당연히 파열의 위험이 크다.
일평생 아파트에서 살았고,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에 세탁기 돌리는 것 정도 삼가면 되는 줄 알았던 나는 영하의 추위가 20일쯤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달랑 2일인데 설마 무슨 일 있겠어,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월요일 아침. 수도가 얼어 물이 안 나온다. 달랑 하룻밤, 열 시간 남짓만의 추위에. 심지어 최강의 추위가 예고된 때도 아니었고 최저 기온이 고작(?) 영하 5도 남짓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주택 설비가 이렇게까지 나약할 일인가...'
라고 탄식을 해 보았자 이미 늦었다.
보일러만 제대로 돌아갔어도 물이 얼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밤사이 분 거센 바람에 송전선이 어딘가 건드려졌는지 동네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이웃 동네는 난방 전력수요 급증에 의해 순환 정전 중이라고 하던데 우리 동네는 고장이 난 것이니 언제 고쳐질지, 이런 날씨에 수리 작업은 가능할지, 기약이 없었다. 다행히 마실 물은 좀 사다 놓았었고, 가까운 이웃에 자가발전기를 소유하고 있어 난방도 되고 물이 나오는 집이 있어 그 물을 길어다 화장실 용수로 사용하기로 했다.
학교는 당연히 취소되었고(일요일에 미리 예고가 되어 있었다) 집집마다 애들과 개들만 엄청나게 신났다. 몇 년 만에, 혹은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본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길에 다 쏟아져 나왔다. 자기 집 차, 남의 집 차 가릴 것 없이 밑으로 기어들어가 고드름을 따서 칼싸움을 하며 신나 하는 모습에 나도 흐뭇하게
'그래, 애들을 본받아야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잖아.'
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정전과 단수가 55시간이나 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월요일 밤에서 화요일 새벽, 최강 추위가 예고된 밤. 난방이 없는 영하 15도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수면양말을 신고, 티셔츠에 플리스 조끼에 재킷을 겹쳐 입고, 캠핑할 때 침낭 안을 데우기 위해 넣어두던 물주머니를 안고, 남편이랑 각각 큰애와 둘째를 하나씩 껴안고 걷어차는 이불을 감싸주며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화요일 오후가 되자 집안 온도가 냉장실이나 별 차이가 없어져 음식들을 일부 아이스박스로 옮겨 놓았고, 냉동해야 하는 것들은 차라리 뒷마당의 눈 속에 묻어놓기도 했다. 간당간당 물이 나오던 집들도 하나 둘 물이 얼어 차라리 친척 집이나 호텔로 피난을 가는 경우도 생겼다. 피난 가서 빈 집의 외부 배관이 터져 길을 물바다로 만드는 바람에 아무나 달려가 일단 잠그고 보는 일도 여러 건이었다. 차고(車庫) 천정으로 수도관이 지나는 집은 그 안의 물이 얼어 수도관이 깨지는 바람에 천정 일부가 무너지기도 했다는데, 우리 집은 그것이라도 면했으니 다행이었다.
물과 전기가 없은지 24시간이 넘어가자 슬슬 뭔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해가 뜨면 밥을 먹고, 나가서 볕을 쪼이며 몸을 좀 움직였다(그게 집안보다 따뜻했다). 냉장고에 남았던 달걀은 몽땅 삶아 놓고 라면과 삶은 달걀, 캔음료, 크래커 따위로 식사를 해결했다. 식사를 했다기보다 '요기를 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다. 설거지는 데운 물과 찬물 각각 두 바가지로 최선을 다해 처리하고, 세수한 물은 버리지 않고 모아서 화장실 물을 내리는 데 썼다. 창가에서 책을 읽고, 해가 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서부 개척시대의 삶이 아마도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학교는 하루하루 수업이 취소되더니 화요일 저녁에는 아예 한 주 통째로 휴교령이 내려졌고, 아이들은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전과 단수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나는 인덕션 레인지는 세상 쓸모없는 물건이며 라이터와 가스레인지가 최고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자동차는 이동 수단으로 뿐 아니라 발전기로도 기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기차? 흥,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사지 않을 작정이다.
수요일, 드디어 기온이 영상권으로 올라왔다. 그래 봤자 섭씨 1~2도지만 양달의 수도관은 확실히 녹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상황이 되자, 왜 이집트인들이 태양신 '라'를 숭배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55시간 만에 전기가 들어왔다! 귓가에서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 파트가 저절로 들려왔다.
이후 두어 번의 순환 정전을 반복한 후 전기는 완전히 공급이 정상화되었고, 마지막 '한 끗(?)'의 추위를 견디지 못한 우리 집의 수도관이 깨지면서 앞마당을 물바다로 만든 것을 끝으로 우리 가족의 '서부 개척시대 체험판'은 끝이 났다. 이후 한동안 '핸디맨(Handyman, 수리공)'의 출장을 예약하는 것도, 수리용 부품을 구하는 것도 어려워 몇 달간 이런저런 불편이 지속되었던 것도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날씨가 조금만 추워지면 동네 사람들은 '군대 이야기를 하며 반쯤 치를 떨고 반쯤 즐거워하는 아재들'처럼 이때의 일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미국 드라마 <버진 리버>에 보면 천둥번개가 무섭게 치는 밤 정전이 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회관 같은 곳에 모여 밤을 새우는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에 오기 전이었다면
'저 드라마 배경이 몇 년대야? 요즘 아니야? 와 진짜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설정 너무하네.'
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이제는 2022년에도 비로 인한 정전과 단수, 통신 두절이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님을 안다.
살아보니 미국은 한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선진국'이라고 하면 응당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부분에서 전혀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다. 배송이 느린 것은 물론이고 분실되거나 엉뚱한 주소로 가 버리기 일쑤인 택배와 우편물, 요즘 같은 세상에 충분히 전산화가 가능할 것 같은데 하지 않는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선거인 등록 및 투표 방식, 위변조 하는 것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듯이 허술하게 생긴 COVID 백신 접종 확인증, 그리고 이렇게 비가 조금만 심하게 오면 정전이 되거나 인터넷 또는 전화가 잘 안 터지고, 조금만 추우면 단수나 정전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 등등.
'이걸 아직도 이렇게 하고 있으면서, 대체 어떻게 이 나라가 선진국이지?'
하고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다소 뻔한 생각이지만, 결국은 시설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싶다.
아, 물론 '사람들이 모두 빠릿빠릿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곳의 행정 처리는 빠르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담당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내 '운명'이 좌우되기도 한다. (언젠가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의 사회보장 번호(SSN)를 발급받는 과정도 퍽 파란만장했다.) 시설의 피해 복구나 수리 같은 경우도 작업자들의 '손이 느리다'라고 해야 할까, 작업 속도가 일단 한국인들만큼 빠르지가 않다. 초과 근무가 이루어지는 일도 드물지만, 근무시간 내라도 작업 간 여유 시간을 충분히 둔다. 한국 사람은 속이 터져나갈 속도로 일이 진행되는 통에 때로는 '아유 그냥 말로 해주면 내가 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기껏 몇 달을 기다려 완성해놓고 간 작업물이 미묘하게 마감이 거칠거나 비뚤어져 있어서 '저걸 내가 깔끔하게 살짝만 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든 적도 많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렇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여유가 미국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도 자기 분야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성공할 테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살겠지만, 그리고 아시안들은 대체로 치열하게 사는 축에 속하지만, 모두가 완벽을 추구하거나 최소한 치열하기라도 해야 할 필요는 없는 여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 그래도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여기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선진국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아닐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꼼꼼하게 일 잘하시는 핸디맨이 빠른 시간에 우리 집에 도착할 가능성은 높지 않기에 오늘은 난방과 배관을 잘 점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