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대신 깃발을 샀다
텍사스에 산다고 하면, 농담 반 호기심 반으로 사람들이 꼭 물어보는 것이 있다.
"그럼 집에 총 있어요?"
'텍사스 카우보이'의 이미지도 강하고,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라는 영화도 있었고, "Don't mess with Texas.(텍사스를 함부로 건드리지 마.)"로 대변되는, 연방정부의 말도 잘 안 듣는, 좋게 말해 독립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불통인 '텍사스 정신'으로 유명해서인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집은 아직 없다. 하지만, 다른 집들은 웬만하면 다 있는 것 같다. 진짜, 다.
이곳에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이 미국 내 다른 지역에 출장을 간 날이었다. 밤 열 시쯤 되었을까, 아이들을 재우고 나도 이제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밖이 약간 소란스러웠다. 멀리 헬기 소리가 들리고, 서치 라이트가 여기저기를 비추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 물어도 되는 시간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마음만 두근대면서 누워있는데, 이웃들의 단체 문자 창으로 누가 상황을 공유해 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강도(Robbery)가 있었고, 용의자가 우리 마을 쪽으로 도망쳐서 헬기 수색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지금 남편이 출장 중이라 없어서 무섭다고 답문을 보내자, 한 이웃이 "창문 블라인드 모두 닫고, 앞마당이랑 뒷마당 불 다 켜놓고, 문 잘 잠그고 자면 돼."라고 알려주었다. 앞마당이랑 뒷마당 불을 켜 두는 이유는 용의자가 우리 집 마당에 숨는 것을 방지하고 헬기의 수색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뒷마당에 어린이들이 들어가 놀 수 있는 놀이집이 있는 멕시칸 이웃이 말했다.
"보통 때 난 저 놀이집 문을 항상 열어 놓는데, 지금은 닫혀있네. 그냥 바람이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저 놀이집 문을 열러 가봐야겠어."
"혼자 가지 말고 경찰이랑 동행해."
"고마워, 그럴게. 그리고 나 지금 내 M16 장전했어."
남편이 일 때문에 조지아(Georgia) 주에 살아서 월말 부부를 하는 동부 출신 이웃은
"남편이 주고 간 리볼버가 있긴 한데 나 쏠 줄 몰라. 그래도 오늘 밤은 혹시나 가지고 자야겠어."
라고 답문을 보냈다.
결국 다른 곳에서 용의자가 잡혔는지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겪고 보니 한동안 진지하게 총기 구매를 고민했더랬다. 이웃들의 문자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보니, 우리 집만 빼고 다 총이 집에 있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그 후로 강도나 헬기 수색은커녕 그런 비슷한 일도 다시 일어나지 않긴 했다. 원래 치안 좋고 안전한 동네라는데, 그날이 우리 가족 나름대로의 '액땜'이었나 보다 싶었다.
텍사스에서 총기를 구매하려면 신원 조회를 거친 후 4~6시간의 훈련을 받고 필기시험과 사격 시험을 통과해서 '면허'를 취득해야 했었는데, 최근 다시 알아보니 얼마 전, 이런 면허 취득 없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법안이 텍사스 의회에서 통과되었단다. 뭐든지 주(州) 별로 규정이 다른 미국이라, 면허 없이 총기 소지가 가능한 주는 이전에도 20개나 되었다고 하니, 특별히 텍사스가 더 위험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하.
심지어 오픈 캐리(Open carry)라고 해서, 종교시설과 학교, 공항 등 일부 장소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타인의 눈에 보이도록 총기를 소지하는 것이 가능한 주들도 있는데, 물론 여기 텍사스가 빠질 수는 없다. 텍사스의 음식점이나 체육관 입구에 '총기를 소지하고 들어오지 말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는 경우가 있어 왜 그런가 했는데, 문구가 없는 데는 가지고 들어가도 되는 모양이다. 하하하.
여하튼, 주변에서 총기 판매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월*트에 가면 심지어 투명한 유리 진열장 안에 총기를 주렁주렁 걸어놓고 판매하고 있기도 해서 진짜로 총을 하나 사 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결국 구매를 하지는 않았다. 총기를 소지한다고 해도 위기 상황에서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자신도 없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잘못 만져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잘 잠가서 꼭꼭 숨겨두어야 할 텐데, 집에 강도가 들었을 때 그 '잘 잠가서 꼭꼭 숨겨둔' 총이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트럼프가 "차이나 바이러스"니 뭐니 하며 아시안 헤이트(Asian hate)를 부추기고 실제로 아시안 증오 범죄가 뉴스에서 보도되는 일이 잦아지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 대책을 세워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다룰 줄도 모르는 총기를 사기보다는 좀 다른 방법으로.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집 앞에 '휴스턴 아스트로스(Astros)' 야구팀의 깃발을 세우는 것이었다.
"휴스턴 아스트로스 깃발을 걸어서 아시안 혐오 범죄를 피해 보자."라고 말하니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나는 이것이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무작위로 들이닥치는 강도를 막을 수는 없을 테고, 다행히 이 동네 치안은 좋은 편이고. 그렇다면 '아시안은 총기도 잘 소지하지 않고 큰 개도 잘 안 키우고 현금이 많다'는 통념에 입각하여 특별히 아시안의 집을 노리는 강도나, 외국인을 노리는 증오 범죄자를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웃들이야 우리가 아시안인 것을 다 아니까 됐고, 그리고 이웃이 그럴 일은 없다고 보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시라도 우연찮게 우리 집을 지나던 나쁜 사람이 외관을 보고 '이 집에 아시안이, 혹은 외국인이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마을 안에 스페인, 멕시코, 호주 등 출신 국가의 깃발을 집 앞에 꽂아둔 집들이 가끔 있길래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그렇다고 미국인도 아닌 우리가 성조기나 텍사스 주 기를 걸어놓기는 좀 그렇고, 텍사스를 연고로 하는 스포츠 팀의 깃발을 집 앞에 꽂아두면 좋겠다고. 그리고 실제로 우리 식구들은 그 팀의 팬이기도 하니까.
2005년부터 방영되고 있는, 최장수 의학 드라마로 유명한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에도 나오지 않던가. 총기난사범을 마주쳤을 때 그에게 자신의 신상을 늘어놓으며 공통점을 찾으면, 그것이 "나도 그 지역을 지나가며 본 적이 있어요, 나도 남자 형제가 있어요." 따위의 아무 의미 없는 정보일지라도, 왠지 '아는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그가 나에게 쉽게 총을 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그렇다면, 적어도 아스트로스의 팬이면서 범죄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은 우리 집을 피해 가 주지 않을까? 그리고 텍사스에는 아스트로스의 팬이 아주 많으니까, 그만큼 안전해지는 셈 아닐까?
계절에 맞추어 "Happy Halloween"이나 "Merry Christmas", "Happy Easter" 등으로 깃발을 바꾸어 걸기도 하지만, 그런 '특별 시즌'이 아닌 날에는 언제나 휴스턴 아스트로스의 깃발을 걸어 둔다. '팬심' 뿐 아니라 '안전'을 위해서 걸어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은 나와 남편만의 비밀 아닌 비밀이다.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휴스턴 아스트로스는 올해 월드 시리즈(World Series) 우승에 도전 중이다. 현재 시리즈 스코어 3:2로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우승하면, 깃발 하나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뻑적지근하게' 마당을 장식해 볼 생각이다.
*Header Photo by Glen Carri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