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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Nov 10. 2021

사정이 있으면, 쉽니다

학교를 빠지는 '놀라운' 사유들

얼마 전,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스쿨 디스트릭트(School District, 한국식으로 말하면 '지역 교육청' 정도에 해당하는 개념)의 모든 학교를 하루 동안 닫는다고 이메일이 왔다. 그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상당량의 비와 거친 바람이 예상되었었기 때문이다.

비가 온다고,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학교를 닫아버리다니, 그것도 재해가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상황에 선제적으로. 벌써 몇 번이나 겪은 일임에도, 전쟁통에도 학교는 열었던 민족의 후예인 나로서는 여전히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곳의 학사 시스템 중에 처음에 굉장히 신기했던 개념 하나가 'Excused/Unexcused Absence'였다. 직역하자면 '이유 있는/이유 없는 결석' 혹은 '이유가 인정되는/인정 안 되는 결석' 쯤 될까.

결석을 하려면 당연히 이유가 있어야지, 무슨 이유가 있고 없고 하다는 것인지. 그런데 텍사스에는 '이유 없는' 결석이라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작은아이가 아침에 가볍게 열이 났다. 체온이 화씨 100도를 넘으면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School Nurse(우리로 치면 양호 선생님에 해당)의 권고사항에 되어있는데, 집에 있는 섭씨 체온계로 재어 보니 37.5도. 화씨로 환산하면 99.5도 정도에 해당한다. 소수점 이하를 반올림하면 100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100도는 아니다. 아, 그런데 병원에서 얼핏 본 화씨 체온계에는 소수점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미묘하다.

100도 이상이면 '학교에서 보내지 말라고 했으니까.'라는 생각에 결석을 시킬 테지만, 누구한테 옮기는 병만 아니면 조금 아픈 걸로는 '감히' 학교를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온 한국 엄마는 고민이 된다.

게다가 결석 사유를 제출하기 위해서는 병원에 가서 확인서(Doctor's note)를 받아와야 하는데, 이곳에서 당일 예약으로 병원에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열 외에는 다른 증상이 없으니 응급실에 갈 일은 당연히 아니고. 나는 결국, 지금 생각하면 퍽 바보 같은 일인데, 이웃에게 문자를 보내 물어보았다. 이웃은

"네가 판단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도 되고 안 보내도 돼, 앤지. 네가 엄마고, 네 아이에게 최선이 뭔지는 네가 제일 잘 아니까."

라고 다정하게, 그렇지만 나에게 도움은 되지 않게 답문을 해 주었다.

"하지만 병원 오늘 못 갈 것 같고, 그럼 확인서도 받을 수 없는걸."

이라고 다시 문자를 보내니,

"Unexcused Absence는 한 학기에 10일인가까지 될 거니까 걱정 마. 그전까지는 그들이 너한테 아무것도 못해(They can do nothing.)"

라고 답이 왔다.

'Unexcused Absence가 뭐지? 그들은 아무것도 못한다고? 그들이 누군데?'

더욱 알쏭달쏭해졌지만, 이쯤 되니 바쁜 아침에 이웃에게 더 물을 일이 아니라 내게 뭔가 기초 상식이 없는 것이라는 감이 왔다. 일단 안 보내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니 아이 학교를 하루 쉬게 하고,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디스트릭트의 규정을 찾아보기로 했다.


결석에는 Excused Absence와 Unexcused Absence, 두 종류가 있었다.

아파서, 건강 검진이 있어서, 예방접종을 맞아야 해서 등의 이유로 결석을 하고 병원에 간 날 의사가 확인서를 써주면 그 결석은 이유가 인정된다. 그 디스트릭트에 등록된 특정 종교 휴일의 경우, 그 종교를 믿는 학생은 이유 있는 결석으로 처리된다. 외국인 학생의 경우 비자 갱신을 위해 본국에 다녀오는 것도 이유가 된다. 이런 Excused Absence는, 사유에 따라 최대 며칠까지만 적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횟수 제한이 없다. 아파서 병원에 가는 일수에 제한을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Unexcused Absence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사유는 아니지만 학교에 안 나오는 경우이다. 가볍게 아파서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고 좀 쉬면 될 것 같은 날, 멀리 사는 친구나 친척이 놀러 온 날, 이곳 부모들은 아이들을 하루 정도 학교에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친척집에 가야 하는데 연휴 첫날부터는 비행기 값이 폭등하니까, 하루 전에 아이를 결석시키고 출발하기도 한다. 이런 결석은 6개월에 10일까지는 별다른 소명 없이 넘어갈 수 있다. 이를 넘어서면 아동 방임이나 학대를 의심하는 디스트릭트와 법원, 경찰 등에 소명을 해야 하지만, 살다 보면 반년에 10일 정도는 이래저래 학교를 빠질 일이 생기기도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웃은 내가 법원이나 경찰을 상대로 복잡한 소명 문제에 부딪힐 것을 걱정하는 줄로 생각하고 나에게 '그들은 아무것도 못해'라고 안심시켜 주었던 모양이다.


한국에서 초등 2학년에 다니던 큰아이를 데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 여행을  적이 있다. 3 정도 결석을 했는데, '가정 학습 신청서' 여행에서 이런 것을 배웠다고 소명하는 '여행 후기' 비슷한 것을 제출해야 했다. 그냥 신나게 놀고 왔을 뿐인데, “ 와중에 이런 것을 배웠다"라고 포장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어서 다시는 아이 학교를 결석하고 여행 가는  따위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더랬다.

물론, 내가 자랄 때는 이렇게 '가정 학습'이라는 명목 하에 결석을 할 수 있는 제도조차 없었다. 학년말에 1년 개근상을 받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초등 6년이나 중고등 3년 개근상을 받는 것은 성실함의 상징으로 생각되었다.

이유를 제출하지 않는 결석은 생각도 못하고 개근상을 명예롭게 여기는 나라에서 살아온 나에게 '몸이 병원에 갈 정도로 아프지는 않아도 하루쯤 학교를 빠질 수 있다'는 개념은 놀랍기까지 했다. 거기다 심지어 '친척이 놀러 와서', '비행기 값이 비싸니까 하루 먼저 출발하려고' 학교를 빠진다니.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었다.



얼마 전 큰아이가 "친구가 시험을 약속한 기준 이상으로 잘 봐서 엄마가 학교를 하루 빠지게 해 줬다고 자랑했다"며 부러워한 일이 있었다. 자기는 그 친구보다 시험 점수가 더 높은데, 자기도 학교 하루 빠지고 놀면 안 되냐고.

Unexcused Absence의 존재를 안 뒤에도, '병원에 가기는 애매할 정도로 아플 때 사용하면 되겠다', 혹은 '한국에서 친척이 오면 하루쯤 학교를 빠질 수도 있겠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시험을 잘 본 아이에 대한 포상으로 학교를 빠지게 해 준다니. 문화 충격을 넘어 내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큰아이에게 말은 안 했지만, 만약 큰아이가 사춘기가 제대로 한 번 오면 학교를 하루 땡땡이치고 함께 바다를 보러 가는 '쿨한' 엄마가 되어줘 봐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나는 한국 엄마니까, 학사 일정표에서 중요한 과제나 시험이 없는 날을 확인해서 날짜를 고르는, '쿨하지 못한' 사전 작업을 하겠지만 말이다.


*Header 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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