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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Feb 25. 2022

피구 말고 다른 거

부러운 생활 체육

나의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을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피구'이다. 누가 정했는지, 왜 그렇게 정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초등 고학년 때부터 체육 시간이면 언제나 여학생은 피구, 남학생은 축구를 했다. 가끔 뜀틀이나 줄넘기, 오래 달리기 같은 것도 했고 남학생들은 농구를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열 번이면 여덟아홉 번은 피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피구를 아주, 아주 싫어했다. 대체 왜 공으로 사람을 때려서 맞추어야 하는지. 지금은 시력 교정 수술을 했지만 당시 안경을 썼던 나는 잘못 맞으면 크게 다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고, 다른 친구를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배구, 농구, 축구, 야구 등 다른 구기 종목들과는 달리 프로 리그도 국제 경기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공으로 일부러 겨냥해 맞추는 행위를 과연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체육 시간이 싫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피구 경기를 시작했다가 일찌감치 다리 같은 데를 맞고 아웃되면 차라리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은 날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운동장 계단이나 체육관 구석에 앉아 있었다. 문제는 이런 여학생이 나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어떻게든 안 움직이려 하는 애들을 데리고 억지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던 선생님들도 참 힘드셨겠다 싶다.

고등학교 2학년쯤 되자 입시에 밀려 주 2회 있는 체육 시간은 '자습 시간'으로 둔갑하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도 남학생들은 '스트레스를 풀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저놈들 체력이 남아 돌아서 쌈박질하고 사고 친다'며 체육 선생님이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갔지만, 여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체육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고 그나마 의무적으로 하던 체육이 아예 없어지자 나는 자연스럽게 운동과 멀어졌다. 피구는 수많은 운동 중 단 한 가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놈의 피구 때문에 체육 시간이 십 년 가까이 싫었던 경험은 '나는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활동 전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내 또래의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스무 살 무렵부터 그랬으니 나이 탓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이야기하다 보면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한 피구가 너무 싫었다'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피구 탓만 하면서 운동을 멀리하는 것은 비겁한 핑계이겠지만, 어린 시절 땀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느껴 보았다면 지금 '소 도살장 끌려가듯' 하는 운동이 조금은 더 즐겁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게, 그 시절 우리는 왜 그렇게 주야장천 피구를 해댔던 걸까. 그것도 피구 전용 공도 아니고 딱딱한, 사람을 맞추라고 만든 게 아닌 배구공으로.


나는 체육을 잘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체육을 잘하는 사람, 몸을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아주 부럽다. 체육 활동은 신체 건강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팀을 이루어 타인과 협력하는 경험, 시합에서 이기거나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 일어서는 경험, 승패에 상관없이 '하얗게 불태워 보는' 경험을 해 보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에게는 꼭 한 가지 이상 스포츠를 가르치리라 생각했었고 일단 태권도를 시켰었지만, 팀 스포츠 활동은 찾아보기 어려워 아쉬움이 많았다. 미국에 오기 직전에는 수영도 잠깐 배우도록 했는데, 수영장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상시 개방되어 있지도 않다 보니 아이들이 평소 수영을 생활 속에서 즐기기는 어려웠다.



텍사스만 그런지, 미국 전체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곳에서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다양한 체육 활동을 시키고 있었다.

일단 여자 아이들은 서너 살이 되면 체조(Gymnastic)를 배우는 경우가 아주 많다. 내가 보기에는 기저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꼬꼬마들이 담벼락에 기대어 물구나무서기를 하거나 어설프게나마 손 짚고 옆돌기를 하며 노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어 처음에는 무척 놀랐다.

그리고 남녀 모두 5세(이곳은 만 5세가 되면 Kinder 학년으로 초등학교에 간다) 정도가 되면 많은 아이들이 클럽 활동으로 팀 스포츠를 한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지만 클럽 스포츠를 하러 가는 아이들은 엄청 많다. 가을이면 플래그 풋볼(Flag Football- 어린이들의 부상 위험을 없애기 위해 미식축구에 깃발 뺏기를 결합한 운동)과 배구, 겨울이면 농구, 봄이면 축구 클럽들이 인원을 모집하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는다. 여름은 지역 단위나 학교 단위 수영팀의 계절이다.

 외에도 소프트볼, 야구, 테니스, 골프, 라크로스,... 여기에 최근 체력뿐 아니라 강한 정신력과 바른 인성 함양할  있다고 각광받는 태권도와 합기도까지. 아무튼 생활 체육을 하나도 하지 않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이다.


이 모든 스포츠를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시설이나 설비가 근거리에 있다는 것이 첫 번째로 부러운 점이었다. 대부분의 마을 단위에 주민들에게 무료 개방되는 수영장이 있고, 뒷마당에 수영장이 딸린 집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차를 몰고 조금 가면 축구, 미식축구, 야구를 할 수 있는 필드(Field)가 나온다. 정식으로 라인이 그려지지 않았을 뿐 쓸만한 공터도 많다. 학교 운동장이나 동네 곳곳에 농구장이 있고, 집에 농구대가 있는 경우도 흔하고, 콜드색(Cul-de-sac,  막다른 골목)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농구대가 놓여 있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체육관에는 우리나라 '헬스장' 같은 설비뿐 아니라 농구장, 수영장, 테니스장, 심지어 골프 코스가 딸려 있는 경우도 많다. 한 마디로 다양한 종류의 스포츠를 근처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다들 한 가지씩은 스포츠를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먼저 부러웠다.



두 번째로 부러웠던 점은 스포츠에 익숙한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소프트볼과 배구는 주로 여학생들의 스포츠이고 풋볼은 남학생들의 스포츠이지만, 그 외에는 특정 성별만 하는 스포츠는 거의 없다. 학교 체육 시간은 중학교부터 남학생과 여학생이 나뉘지만, 나뉘어서 수업을 할 뿐 하는 활동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클럽 스포츠도 중학생 이상부터는 성별에 따라 팀을 짜는 경우가 많지만, 리그가 별도로 있을 뿐이지 많은 여자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스포츠를 즐긴다. 아니, 여아들의 리그를 별도로 개설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운동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증거이려나. 최근에는 COVID의 영향으로 클럽 스포츠를 하는 아이들이 줄어들어 중학생 연령에서도 남녀 혼합으로 팀을 짜는 일이 가끔 있긴 하지만.


며칠 전의 일이다. 우리 아이들은 YMCA에서 겨울 시즌 농구를 하고 있는데, 큰아이의 농구 경기에서 상대 팀 선수 몇 명이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은 사태(!)가 있었다. 연휴가 낀 토요일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했지만 여하튼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었고, 경기는 큰아이 팀의 부전승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팀에 상관없이 같은 인원수로 두 팀으로 나뉘어 번외 경기를 즐겼다. 이 과정에서 큰아이는 상대 팀이었을 여자아이와 같은 팀이 되어 플레이했다. 큰아이의 패스로 여자아이가 슛을 성공시키자 둘이 주먹을 부딪히며 파이팅을 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초등 고학년 때부터 남학생들과 구분되어 체육 수업-정확히는 피구 수업-을 했고 어지간한 같은 반 남자아이들보다 키가 컸음에도 나(와 나를 비롯한 여학생들)의 운동 능력은 남학생들의 그것에 한참 못 미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과 방과 후의 운동장은 당연히 남학생들의 것이었고 다른 생활 스포츠 시설도 없으니 여학생들은 운동을 하려야 하기도 어려웠던 데다 어느 순간부터는 선생님들조차 여학생들을 이끌고 체육 수업을 하는 것을 반쯤 포기하는 분위기였는데.

여학생들에게도 남학생들에게만큼 체육을 권하는 분위기였다면. 피구 말고 다양한 종목을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면. 성별에 관계없이 땀을 흘리며 같은 목표를 향해 협동해 본 경험, 남학생과 체력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경험을 많은 여자들이 학창 시절에 보편적으로 할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최근 한국도 <골 때리는 그녀들>이나 <오늘부터 운동뚱>, <노는 언니> 등 운동하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다양한 운동을 즐기는 여성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반가웠다.



언젠가 온라인에서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 분이 올린 글을 본 적이 있다. 밤늦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자기는 씻지도 못하고 뻗어서 잠들었는데, 다음날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국인 동료들 몇몇은 클럽에 가서 새벽까지 놀고 왔더란다. 공부고 일이고 결국 마지막은 체력 싸움이라는데, 그들의 무한 체력에 질투가 나서 죽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인종에 따른 체격 차이도 있긴 하겠지만, 어려서부터 꾸준히 운동을 할 환경이 충분히 주어지는 것과 무관하지는 않지 않을까.


물론 한국도 건강과 미용 측면에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생활 체육이라기보다는, 많은 부분이 '작정하고' 배우는 것이거나 시간 또는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만 즐길 수 있는 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다음 세대가 적어도 우리보다는 다양한 생활 체육을 꾸준히, 남녀 구분 없이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텍사스 아이들이 조금은 덜 부러워질 것 같다.


*Header Photo by Lars Bo Niels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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