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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Feb 02. 2022

악보 없는 음악 시간

텍사스 초등학교의 음악 수업

피아노 건반의 개수는 88. 피아노의 정식 이름은 피아노 포르테이며, 피아노는 부드럽게, 포르테는 강하게 라는 .

악보에서 플랫이 붙는 순서는 시-미-라-레-솔-도-파. 샵이 붙는 순서는 반대로 파-도-솔-레-라-미-시.

시에 플랫이 붙은 음계는 바장조, 시와 미에 플랫이 붙은 음계는 나장조,...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것들이다. 아니, 이실직고하자면 나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를 졸업한 세대이고 나보다 두어 살 아래 학년부터 졸업장이 '초등학교'로 바뀌긴 했다. 여하튼 그 시절 우리는 학교 음악 시간에 악보를 읽고 음표를 그리는 법, 연주 속도나 셈여림을 나타내는 용어들, 스타카토니 테누토니 페르마타니 하는 악상 기호들을 배웠다. 이런 기초 지식들을 달달 외워 시험도 보았었다.


이곳 초등학교는 매일 스페셜(Special)이라는 이름의 예체능 교육 시간이 있는데, 이 시간은 음악-체육-미술-체육-음악-체육-... 같은 식으로 체육은 격일마다, 음악과 미술은 4일마다 한 번 씩 수업을 한다. 한 주는 5일인데 돌아가는 과목 조합은 4개이다 보니 '우리 반 오늘 스페셜 뭐 하는 날이더라?'하고 다소 헷갈리기는 하지만 큰 문제는 없다. (체육이 없는 날이면 반드시 팔랑팔랑 한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등교하고 싶어 하는 이웃집 여아의 엄마는 오늘 스페셜이 뭔지 기가 막히게 외우고 있지만.) 4학년인 우리 집 둘째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 시간이 바로 이 스페셜이다. 음악과 체육, 자기의 '최애' 과목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둘째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조금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연습을 위해 새벽같이 등교해야 하는 학교 합창단을 자원해서 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는 아이이니 배워보는 것도 좋겠지 싶어 개인 레슨을 받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피아노 레슨을 처음으로 간 날, 나는 아이가 악보를 하나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아노 선생님도 아이가 악보를 전혀 읽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수업을 진행하신다는 점이었다.

'학교에서 악보 읽는 것 안 배웠나? 4학년이잖아..? 아니 그럼 대체 음악 시간에는 뭘 배우는 거지?'

놀랍고 궁금해서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일단은 얌전히 레슨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레슨을 나오는 길, 으레껏 해 주는 말씀일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선생님이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고 칭찬을 해 주셔서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간 아이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ㅁㅁ아, 근데 엄마가 궁금한 게 있는데, 학교에서 악보 읽는 거 안 배웠어?"

"아니."(아이는 부정 의문문에 대답할 때 영어식으로 한다. 그러니까 안 배웠다는 뜻이다.)

"그럼 음악 시간에는 뭐 해?"

"노래 배워. 리듬 맞춰서 손뼉도 치고 발도 쿵쿵하고."

"악보 볼 줄 모르는데?"

"노래 배워서 부르는데 악보 몰라도 돼."

"...!"

한 대 얻어맞은 기분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아니 잠깐, 너 합창단이잖아?"

"그것도 악보 필요 없어, 엄마. 레드(Red) 팀이랑 그린(Green) 팀이랑 연습해서 나중에 합치는 거야."

지난번 공연 때, 다소 서투르긴 했지만 분명 파트가 나뉘어 있었고 돌림노래도 불렀었다. 그런데 그것을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해내셨다는 말인가? 선생님들의 인내심과 교수법에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 대체 음악 이론 기초는 언제 배우는 걸까. 5학년 때 배우나? 나는 중학교에서 선택 과목으로 밴드(Band, 관악기 합주부)를 하고 있는 7학년 큰아이에게 물어보았다.

"ㅇㅇ아, 초등학교 때, 미국 초등학교에서 말이야. 너 4학년 하고 5학년 때. 음악 시간에 악보 보는 것 안 배웠어?"

"아니."(이놈이나 저놈이나 부정 의문문에 대한 대답을 영어식으로 해서 헷갈려 죽겠다. 아무튼 얘도 안 배웠다는 뜻이다.)

"한국 초등학교에서는 배웠었을 거 아냐."

"그건 다 까먹었지. 어릴 땐데."

지금은 안 어리냐,라고 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그럼 너 지금 밴드에서 악보 어떻게 봐?"

"6학년 때(이곳은 6학년부터 중학생이다) 밴드 선생님이 다 가르쳐줬는데."

"밴드 시간에 악보 보는 것부터 가르친다고? 밴드 선택 안 하는 애들도 있잖아. 걔네들은 어떡해?"

"뭘 어떡해?"

"평생 악보 볼 줄 모를 수도 있잖아."

"...? 그러면 안돼?"

"...!"

하긴, 악보를 볼 줄 몰라도 사는데 큰 지장은 없다.

'아니 그렇지만, 기본 교양이라는 게 있잖아?'

소심하게 반론을 제기해 보지만, 악보를 못 읽는다고 해서 교양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도 없고, 악상 기호 좀 모른다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좋아하지 못할 리도 없으니 반론으로서의 근거가 빈약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큰아이가 나와 함께 연습하면서 이것저것을 표시해 둔 악보를 보신 선생님이

"이거 엄마가 표시하신 거라고? 엄마가 음악 하시니?"

라고 물었다던 것이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곡의 분위기에 맞춰 악상 기호를 몇 군데 그려 놓고 메트로놈(Metronome) 숫자를 적어 놓은 정도였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 아니라, 중등교육 과정에서 음악을 조금이라도 선택하여 배운 사람만 아는 지식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그 질문에 내가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안다는 이유로 큰아이가 "Yes"라고 대답했다고 해서 '이 녀석아 그 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닐 거야. 엄마가 음악 전공자도 아닌데 그렇게 대답하고 오면 어떡해.'라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더랬다.



다소 이분법적인 생각이지만, '악보쯤 읽을 줄 몰라도 음악을 즐기도록 가르치는 쪽'이 '온갖 악상 기호들을 외우느라 음악 이론에 질려 음악을 싫어하게 되는 쪽'보다 음악 교육 소기의 목적에 더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텍사스 공립 교육기관의 음악 교육이 한국식 음악 교육보다 더 낫다, 혹은 진보적이다라는 식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당연한 줄로만 생각했던 기초적인 음악 지식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내가 둘째의 피아노 레슨과 큰아이의 밴드 활동에 때때로 도움을 줄 수 있어 정말 다행이고 즐겁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받고 자란 한국 공교육에 새삼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으니까.


중학교 1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문득 생각났다.

"니들, 국영수 같은 아-무 쓸데없는 거만 공부하지 말고, 음미체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나중에 너네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거는 국영수가 아니라 음미체거든."

그래, 어느 쪽 음악 교육이든,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건 확실했다.


*Header Photo by CD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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