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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Oct 01. 2021

“아픈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 거야.”

<사이코지만 괜찮아>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삶이 고단해서 사랑 따위 할 여유가 없는 문강태(김수현 분)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결핍된 '사이코' 고문영(서예지 분)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 과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주연 배우들의 외모, 특히 서예지 배우의 화려한 의상과 소품들로도 화제가 많이 되었는데, 고문영의 직업이 동화 작가라는 설정 덕분에 중간중간 등장하는 삽화 같은 장면들과 판타지적인 분위기도 묘했고, 여러 모로 시각적으로 매우 매력있는 드라마였다.



'괜찮은 정신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보호사 강태에게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는 형, 상태(오정세 분)가 있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살해당했다. 형 상태는 엄마가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한 충격으로 '나비'의 악몽에 쫓기며 산다. 봄이 되고 나비가 지천에 날아다니면 히스테리성 발작을 일으키는 형을 진정시키기 위해, 강태는 거의 매년 이사를 해야 했다.

한 직장에 오래 다니지를 못하니 진급이나 월급 인상도 기대하기 힘들었고, 오히려 이런저런 누명이나 덮어쓰기 일쑤, 평판만 나빠졌다. 그러다 보니 모아둔 돈도 없고, 친구도 딱 한 명, 조재수(강기둥 분)밖에 없다. 대신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좋은 친구이긴 하지만.


강태는 태어난 이유도,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도, 이 고단한 삶 다 때려치우고 죽지도 못하고 있는 이유도 오직 형을 돌보고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왔다. 정신병원 보호사라는 직업도 아마 형을 돌보고 지키기 위해 선택하게 된 듯하다. 어릴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형 옆에 있어야 돼. 키우는 건 엄마가 할 테니까, 너는 지켜주고 챙겨주고, 그러면 돼. 엄마가 너, 그러라고 낳았어."

이 말은 강태의 가슴에 멍이 되어 오래도록 남는다.

강태는 어릴 적, 태권도장에서 '빨간 띠'를 따고 신나서 집에 온 날 칭찬은커녕 엄마에게 등짝만 실컷 얻어맞은 기억이 있다. 그날 형이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당하고 맞고 왔는데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없는 살림에 강태를 태권도장에 등록시켜 준 이유는 형을 지켜주라는 것이었는데.

이런저런 서러운 기억은 너무도 많아 일일이 셀 수도 없다.


어느 날, 세 들어 사는 집 옥상에서 강태와 둘이 맥주를 마시던 재수는 술기운을 빌려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상태, 강태의 엄마에게 소리친다.

"어머니... 그 우리 강태한테 왜 그랬어요, 왜? 상태 형만 아들입니까? 뭐, 아픈 자식만 자식이에요? 왜 애를 차별해서 애가 덜 크게 만들어요? 왜? 왜?"

눈물범벅인 얼굴로 웃으며 강태는 중얼거린다.

"미친놈."



강태의 시선에서 기억되는 엄마의 모습은 대체로 야속한 모습이다.

비 오는 날, 가난한 세 모자는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걸어가는데 엄마는 형이 비에 맞지 않도록 하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강태는 우산 밖으로 떨어져 나가 쫄딱 젖고 있는데도 모르고 그냥 가 버린다.

좁은 방에 웅크리고 잘 때도 엄마는 언제나 형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잔다. 강태도 엄마의 품이 그리운데도.

더 어린애인 강태에게 "형을 지켜줘야 한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도 모자라, "그러라고 너 낳았어"라니. 그게 할 소리인가.


그런데, 내가 엄마의 입장에 이입하게 되는 나이가 되어서였을까, 강태가 딱하기는 하지만, 나는 엄마를 야속하게만 기억하는 강태도 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상태는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 '더'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상태와 강태가 어렸을 때는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였을 테니, 지금보다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인식은 훨씬 부족했을 것이고, 상태는 동네 어린아이들의 놀림감, 맨날 구설에 오르내리는 '동네 바보'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나도 부모가 되어 보니, 아이가 열이 나기만 해도 약 먹고 잠든 아이 땀을 계속 닦아 주며 "엄마가 미안해."라고 수십 번 중얼거리게 되는 게 엄마더라. 상태의 엄마는 상태에게 몇 번이나 그 말을 했을까.

"엄마가 미안해."

그래도 부부가 함께 했다면 조금은 숨 쉴 여유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남편마저 세상을 일찍 떠났다. 엄마 혼자 아이 둘을, 심지어 하나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본인이 아이를 돌볼 수도 없고, 돌보는 사람이나 시설을 알아볼 여유도 없는 생활 속에서, 더 어린 쪽에게 "형을 돌봐야 한다"라고 신신당부하고 직장으로 향하는 엄마의 마음은 매일 얼마나 찢어졌을까.

아버지의 제사상 앞에서 엄마는 말했었다.

"나, 당신처럼 일찍 안 죽어. 나 엄청 오래 살 거야. 우리 상태 늙어 죽는 것까지 보고, 그다음 날 나도 따라 죽을 거야."

아픈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 그러니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엄마는 결코 강태에게 형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엄마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강태에게 짐을 지운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너무 힘들어 실은 당장이라도 삶을 놓아버리고 싶지만 자식들이 눈에 밟혀 그럴 수도 없다는 처절함이, 한 달도 일 년도 아니고 '하루만' 더 살겠다는 말에서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라고 너 낳았어"라는 말은 어린이에게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엄마도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면서 강태에게도 사랑을 듬뿍 느끼게 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재수가 하늘나라를 향해 삿대질을 할 때 옥상에 올라온 집주인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 에미 다 죄인이지. 아무리 그래도 너네 엄마는 좀 봐드려. 그 시절에 남편 없이 여자 혼자 애 키우는 거? 허이고... 딸 하나 둔 나도 골백번은 도망치고 싶었는데, 너네 엄마는 사내애를 둘씩이나 건사했어. 거기다가 상태, 걔는 좀 유별나? 네가 여태 형 보호자로 살아봐서 잘 알 거 아냐. 그게 얼마나 힘들고 막막한지."


그날 밤, 실컷 울고 난 강태는 잊고 있던 기억의 뒷부분을 떠올린다.

엄마랑 셋이 먹으러 가곤 했던 시장통 입구의 짬뽕을 좋아한 것은 형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것을. 셋이서 두 그릇만 시켜야 할 정도로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매번 장 날마다 짬뽕을 먹으러 간 것은 오직 강태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강태는 우산 밖으로 떨어져 나가 쫄딱 젖고 있는데도 모르고 그냥 가 버린 줄 알았던 엄마가 사실은 몇 걸음 앞에서 불렀었다는 것을. 그래서 형이랑 엄마 사이에 자신을 꼬옥 보듬고 집까지 걸어가 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강태가 잠든 다음에 강태 쪽으로 몸을 돌려 "이쁜 내 새끼, 엄마가 많이 미안해."라고 몇 번이나 안아주었다는 것을.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것, 엄마도 엄마의 삶이 무거웠을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해도, 이미 받아버린 강태의 상처가 순식간에 깨끗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는 것과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은 모두 별개이니까. 그래도 최소한 상처가 더 이상 벌어지거나 악화되지는 않겠지.

살다가,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진 어느 날, 강태가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강태 역인 김수현 배우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 고작 대여섯 살 어릴 뿐인데, 보는 내내 강태 엄마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있었네. 미리 나이 든 것 같아 어쩐지 억울하군,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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