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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Sep 28. 2021

영화에 나오지 않은 사람 때문에 울었다

영화 <클래식>

오래전 개봉했던 <클래식>이라는 영화가 있다. 조승우, 손예진, 조인성 배우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최근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주인공들이 연주하여 다시 한번 화제가 된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라는 OST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몇몇 장면은 지금도 회자될 만큼 아름다운 영화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동화책이나 만화책, 영화를 보면 며칠씩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생각만 하던 아이였다. 특히 극 중에서 주인공만큼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조연이나 단역의 살아온 이야기가 궁금한 적이 많았다. 나는 다들 그러는 줄 알았는데 누구나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영화 <클래식>이었어서, 나에게는 조금 더 기억에 남는 영화이다.


2003년 작품이라 이미 내용이 대부분 알려져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이하 요약에는 결말이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지혜(손예진 분)와 수경(이상인 분)은 연극반 선배 상민(조인성 분)을 좋아한다. 수경은 지혜에게 상민에게 보낼 편지의 대필을 부탁하고, 지혜는 수경의 이름으로 상민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자신의 편지로 맺어진 수경과 상민이 가까워지면서 지혜는 상민을 멀리 하려 하지만, 자꾸만 마주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지혜는 우연히 엄마 주희(손예진 분, 1인 2역)가 간직하고 있던 편지 상자를 보다가 엄마의 젊은 시절 연애사를 알게 된다.

1968년, 준하(조승우 분)는 여름 방학 때 시골 삼촌 댁에 갔다가 주희와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진다. 학교로 돌아온 준하는 친구 태수(이기우 분)에게 연애편지의 대필을 부탁받는데, 그 대상은 운명처럼 주희였다.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다 깊어진 엄마의 첫사랑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는 지혜.
태수와 주희네는 집안끼리 결혼이 약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태수는 주희와 준하의 마음을 알고 본인은 빠지려고 하지만, 주희네 집안과 반드시 사돈을 맺으려는 부모의 반대와 학대가 심하여 괴로움에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된다. 충격을 받은 준하는 자원입대해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고, 부상을 당해 시력을 잃는다.
태수만큼 잘 사는 집안도 아닌 데다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니 주희에게 짐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준하는 "이미 결혼했다"는 거짓말로 주희를 떠나보낸다. 주희는 태수와 결혼하여 지혜를 낳았다.

현재. 알고 보니 지혜의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라 상민도 지혜를 좋아하고 있었고, 상민은 준하가 남긴 아들이었다. 상민은 아버지가 주희에게 받았던 목걸이를 지혜에게 주면서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조승우 분)와 아들(조인성 분)이 똑같이 생긴 여성(손예진 분)을 사랑했으니, 그 집안 남자들 취향 참 소나무 같구먼, 싶다.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이루어질 인연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가 아니었을까. 내 생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간절히 원하고 사랑했기에, 자식들이라도 이어진 것이라고. "우연히, 우연히, 그러나 반드시"라는 영화의 메인 카피 역시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지혜와 상민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희와 준하가 간절히 사랑했던 필연이라고.

영화 중간에 준하와 주희가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펑펑 울기도 했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준하 나쁜 사람이네."였다. 영화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 준하의 아내이자 상민의 엄마인 어느 여성의 인생이 너무 아팠다.



준하가 자신이 장애인이라서 주희가 고생할까 봐 떠나보냈을 정도로,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설비가 턱없이 부족하고 장애에 대한 편견도 심한 편인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또는 장애인의 가족으로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당한 부상이니 국가의 지원이나 몇몇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쉬운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준하와 결혼하겠다고 자신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부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만큼 준하의 아내 되는 사람은 준하를 깊이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준하는 일평생 주희가 준 목걸이를 간직할 정도로, 그 목걸이를 아들에게 줄 정도로 마음 한 구석에 주희를 품고 살았다. 이건 "젊었을 적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지.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지."하고 첫사랑의 추억만을 간직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주희와 준하의 간절한 사랑이 지혜와 상민을 이어준 거라고.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했음에도 간절하고 애틋했던 둘의 사랑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려 자식들끼리 만나게 했다고.

어쩌면 준하의 아내는 남편의 마음속에 일평생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랑이 덜 아프거나 덜 안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세상의 많은 일들이 “네가 다 알면서도 선택한 거잖아.”만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지자면 지혜의 아빠인 태수도 안타깝기로는 비슷하지만, 적어도 태수는 영화에도 나오고 이름도 있는데 준하의 아내는 존재조차 비추어지지 않는 것이 너무 짠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온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며 화를 내니, 한 친구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는데, 너는 대체 무슨 영화를 본 거냐”라고 어이없어했다.



거의 이십 년 전에 본 이 영화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있는 이유는 과거를 배경으로 한 주희와 준하의 사랑이 애틋해서도 아니고, 현대를 배경으로 한 지혜와 상민의 사랑이 몽글몽글 설레어서도 아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적어도 자신이 행복할 수 있을 만큼은 사랑받았는지 알 수 없는, 영화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 사람 하나가 내내 마음에 걸려서이다.

그 2003년의 어느 날, 영화관에서 나는 혼자 다른 영화를 보고 나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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