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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Oct 07. 2021

악의 조직 말단 사원이 걱정된다

<블랙 위도우>

나는 전쟁 영화를 잘 못 본다. 부상당한 신체 묘사가 잔인하다거나 피가 많이 나오는 경우도 부담스럽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전투 장면 자체가 나에게는 전체적인 내용을 감상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전쟁 영화에서 전투 신(Scene)이 영화를 보는 데 방해가 된다니,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방금 폭탄 한 방에 죽어 쓰러진 수십 명,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지만 저 사람들 각각에게 분명 1인분의 인생과 사연이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담담하게 볼 수가 없다. 눈물만 약간 나고 넘어가면 다행인데, 엑스트라 배우가 짧은 대사로 가족 관계라든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사연을 짐작하게 하면 그때부터 한참을 끅끅대며 울기 바쁘다. 탱크나 무기 등 소품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액션이 얼마나 장대한지, CG가 얼마나 실제 같은지가 중요한 관람 포인트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영상미'에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션 임파서블>이나 <007 시리즈> 같은 종류의 영화에서 대규모 추격 신을 볼 때도 비슷하다. 주인공과 악당이 불가피하게 벌이는 추격전에서 악당 '조무래기'들이 탄 차량이 뒤집어지거나 불에 타고,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들은 이후에 어찌 되었을까가 마음에 걸린다. 살았을까. 살았다면 누가 치료해주긴 했을까. 오히려 고통만 길게 느끼다 죽는 건 아닐까. 죽으면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이라도 있으려나.

아마도 제작진이 가장 공들여 만들었을 '장대하고 호쾌한 액션 장면'이겠지만, 종이인형처럼 픽픽 죽어나가는 악당 조직의 말단 부하들이 너무 많으면 "시원하다"가 아니라 "착잡하다"는 생각이 들어버리고 만다.



악의 조직 최말단부에 있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여차하면 총알받이로 쓰이는 사람들.

최종 보스는 간혹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이 그려지고 그래서 선하기만 한 주인공보다 매력적이라는 평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말단 조직원들은 그냥 나와서 주인공에 의해 최대한 화려하게 패대기 쳐지고 죽는 게 다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야말로 소모품처럼.

조직의 핵심 정보에 다가갈 정도는 아니니까, 자기가 복무하고 있는 조직이 사실은 거대한 악의 축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월급 따박따박 잘 주니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 생계가 간당간당한 사람일지도.

어쩌면 가족조차도 없는, 노숙인이나 고아나 혹은 심지어 악당들이 납치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아마도 자신이 얼마나 불공정한 근로 계약으로 묶여있는지 모르고 있겠지. '여차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조항은 숨겨져 있었거나, 혹은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거나.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고 보호자가 든든히 살아있으면 그런 조직에 흘러들어올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이런저런 경범죄에 연루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자리인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한 청소년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주인공이 살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차 밖으로 밀어 떨어뜨려져 죽는 '조직원 17' 같은 사람들이 딱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오래전 원가족과의 연락도 끊어져, 시신 수습은커녕 사망 소식조차 가족에게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짠하다.



얼마 전 본 영화 <블랙 위도우>의 위도우들이 이랬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짐작해보던 이유들 중 하나로 악의 조직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

한때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 분)도 몸 담았던 적이 있는 '레드룸'이라는 조직은 전 세계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데려다가 세뇌시켜 '위도우'라 불리는 인간 병기로 만든다. 말이 좋아 '데려다가'지 상당수가 납치 혹은 인신매매였다. 아이를 찾으려고 하는 부모를 죽여버리기도 했다. 버려진 아이들, 애초에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은 더 쉬운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고.

보호자도 가족도 없다시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죽더라도 그것을 알아줄 이도, 슬퍼해줄 이도 없었다. 그저 비품처럼, 새 멤버로 대체되면 그뿐.

나타샤는 더 이상 이렇게 소모품처럼 죽어나가는 여자 아이들이 없게 하기 위해 레드룸으로 향한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에서, 모든 것을 부수기 위해.


레드룸의 리더 드레이코프가 위도우의 '공급원'은 무한하다는 식으로 말할 때, 드레이코프의 컴퓨터 화면 위로 수백 명의 평범한 여자 아이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을 얼굴들. 비록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지만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레드룸은 물론 가상의 조직이다. 하지만 실제로 레드룸 같은 조직이 없을까? 레드룸처럼 '인간 병기'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납치하는 조직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경제적 이익이나 성 착취 등을 목적으로 아이를 납치하거나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을 노리는 범죄 조직은 불행히도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한 현실과 겹쳐져 오싹 소름이 끼쳤다.



나는 액션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큰아이 덕에 언제부터인가 마블 영화들은 꼬박꼬박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히어로와 싫어하는 히어로도 생겼는데, 블랙 위도우는 단연 전자다. 요즘 말로 하면  ‘최애캐릭터다. 혹시 <블랙 위도우> 영화를 볼까 말까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정말 재미있는 영화이니  보시라고 하고 싶다.


전쟁 영화나 액션 영화를 보면서 이름 없이 죽는 배역이 하나도 없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이야기 진행상 필요하기도 할 것이고, 그런 장면이 꼭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감상적이 될 틈조차 없이 쏟아지는 죽음이 악당이 없어져야 하는 정당성을 더 부여할 수도 있고,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그 어떤 감동적인 대사보다도 잘 설명해 줄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악당 조직의 말단 사원이 수십 명씩 ‘퇴치되는’ 장면을 보면 호쾌함보다 걱정이 앞선다는 것뿐이다. 악의 조직에 몸담은 사람들인 건 맞지만, 그리고 실제 상황도 아니지만, 씁쓸하다. 그래도 그들도 하나씩 들어보면 1인분의 인생과 사연이 있었을,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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