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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Oct 12. 2021

"곽덕순이 아들이 곽덕순이를 닮었는디"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되는 옹산은 충청도 어딘가로 추정되는 가상의 시골 마을이다. 게장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에서 억척스럽게 가족을 부양해 온 여성들이 있는, 아내들이 남편들보다 조금, 아니, 많이 더 입김이 센 동네.

고아이자 미혼모인 동백(공효진 분)은 남자 친구였던 종렬(김지석 분)이 언젠가 살고 싶다고 한 이 옹산에서 '까멜리아'라는 이름의 식당을 운영하며 종렬의 아들 필구(김강훈 분)를 키우고 있다. 처음에는 종렬이 혹시 자기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기대는 희미해졌고 먹고살기도 바빠 추억이나 낭만 따위도 없다.

음식보다 술이 마진이 많이 남기 때문에 '까멜리아'는 술집도 겸하고 있지만, '술장사 하는 미혼모'로 살다 보니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리거나 때로는 피해를 보기 일쑤이다. 마을에서 동백을 감싸주고 챙겨주고 사람들이 함부로 쑥덕대지 못하게 지켜주는 사람은 곽덕순 여사(고두심 분) 뿐이다. 어느 날 곽덕순 여사의 셋째, 황용식(강하늘 분)이 고향에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용식은 가만 보면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데 그 머리를 '계산'에 써먹지는 않는 남자이다. 앞뒤 계산 안 하고 몸을 날려 범죄자를 체포한 공으로 경찰에 특별 채용되어 서울에 갔다가, TV 카메라 앞에서 뻔뻔한 발언을 하는 범죄자를 역시 앞뒤 계산 안 하고 발로 걷어차서 고향 마을로 좌천된 남자.

몇 년만에 돌아온 고향 옹산에서 동백을 본 용식은 첫눈에 반한다. 동백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용식이 생각한 건 딱 한 가지-유부녀만 아니면 됐다, 동백에게 올인을 하자. 용식은 계산뿐 아니라 편견도 없다.



30여 년 전, 용식을 임신했을 때 남편을 사고로 잃은 곽덕순 여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여자 혼자 자식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남편이 죽은 지 며칠 만에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순댓국밥집 영업을 다시 시작한 곽 여사에게 사람들은 "저렇게 독하니까 남편을 잡아먹었지."라고 했다. 그게 아니라, 남편이 죽어서 독해져야만 했던 것인데.

동백이도 어떻게 살아서 미혼모가 된 것이 아니라, 미혼모가 되었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것임을 곽 여사는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동백의 과거를 추측하며 수군댈 때, 곽 여사는 착하고 성실한 현재의 동백을 보았다. 젊은 날 자신의 모습이 동백에게 겹쳐 보여 짠했다. 옹산 사람들은 그런 곽 여사와 동백을 '베프(베스트 프렌즈)'라고 불렀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동백이를 좋아한단다. 그간 유일하게 편견 없이 동백을 바라보아 주던 곽덕순 여사이지만, 막상 내 아들이 동백을 좋아한다니 마음이 복잡하다.

"엄마, 동백 씨 좋아했잖어, 아니, 좋아하잖어. 친구로는 괜찮고, 뭐, 며느리로는 뺀찌여? 엄마 이렇게 얄팍한 사람이여?"

용식의 말에 곽 여사는 자조적으로 대답한다. 응, 나 얄팍햐.

'자식이 가시밭길을 가겠다는 데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어. 내 자식도 키우기 어려운데 하물며 남의 자식을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려울 거야. 이게 내가 지금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잖아?'

혼자 자기변명도 해 보지만 영 찜찜하다.

"동백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

라고 덕담 아닌 덕담도 해보지만, 동백이도 알고 있다. 결혼해, 뒤에 붙은 말은 "내 아들은 말고"라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도 기만적이다.

결국,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동백과 필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까지 하고 만 곽 여사는 자괴감과 후회로 한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초에 용식이 동백을 좋아한 데에는 곽덕순 씨의 탓(?)이 가장 컸을 거라고 생각한다. 둘이 사랑에 빠진 것은 '하필이면 내 아들이랑 눈이 맞은 동백이' 탓도 아니고, '얄궂은 인연' 탓도 아니고, 곽덕순 여사 본인의 인성 탓이라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동백의 '현재'와 '본성'을 본 곽덕순 씨의 아들이라서, 편견도 계산도 없는 사람이라서 용식은 동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용식과 동백의 사이를 결국 허락하는 곽덕순 여사에게 동백은 말한다.

"용식 씨가 회장님(곽덕순 여사)을 닮아서 그렇게 따뜻했나 봐요."

곽 여사는 눈물 고인 눈으로 웃으며 대답한다.

"곽덕순이 아들이 곽덕순이를 닮었는디, 니가 안 좋아할 재간이 있어?"


이 말을 하면서 곽 여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드라마의 분위기는 '드디어 곽 여사에게 용식과의 관계를 허락받은 동백이' 느낌이었지만, 내 눈에는 '동백에게 모진 말을 했던 것이 내내 걸렸는데, 용서받은 느낌에 마음이 조금 편해진 곽 여사'가 보이는 듯했다.

동백과 이 대화를 나누던 순간, 곽 여사는 용식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곽 여사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내 아들은 따뜻하고 사람의 본성을 볼 줄 아는 사람이구나. 나는 잠시 내 자식만 위하는, 비뚤어진 모성애에 눈이 어두워 동백이를 원망하고 운명을 원망했지만, 내 아들은 나보다 나은 인간이구나, 하고.

그리고 동백에게 조금 부끄러워졌을 것 같다. 나는 내 자식 생각하느라 네 가슴에 못을 박은 적도 있는데, 너는 그래도 용식이가 '나를 닮아 따뜻하다'라고 해주는구나.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

극 중 동백은 말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 라고.

곽덕순 여사를 만나고, 옹산의 이웃들을 만나고, 무엇보다도 용식을 만나면서 일평생 외로웠던 동백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곽덕순 여사와 옹산 사람들, 용식 또한 동백으로 인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기적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일어난다면 그것은 결국 '사람이 사람에게 되어주는 그 무엇'일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용식과 동백의 사랑 이야기 외에도 '까멜리아' 종업원 향미(손담비 분), 건물주 규태(오정세 분), 규태의 아내이자 유능한 변호사 자영(염혜란 분)과 동백을 위협하는 살인마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멜로와 휴먼 드라마, 심지어 스릴러까지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워낙 인기가 많았기에 드라마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 많지는 않겠지만, 혹시 있다면 한 번쯤 보셔도 좋을 것 같다. 여기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정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얽혀있으니, 이 글을 읽었다고 해서 '내용을 알아버려 재미없는 것 아닐까'하는 걱정은 하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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