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지 Oct 12. 2021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어둠 속의 미사>

<어둠 속의 미사(Midnight Mass)>는 비교적 최근 넷*릭스에 올라온 7부작짜리 공포 드라마이다. 감독, 각본, 연출을 혼자 다 해낸 마이크 플래너건은 이쪽 장르에서 유명한 사람인 모양인데, 나는 공포물이라면 질색하는지라 전혀 몰랐다. 이 작품이 추리물인 줄로 잘못 알고 보기 시작했다가, 보다 보니 공포물이어서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더랬다.

나는 공포물에서 조용하다가 귀신이 확 튀어나오는 장면을 한 번 보면 며칠 동안 잠을 못 잔다. 그래서 애초에 공포 장르에는 손을 대지 않는 편인데, 호기심에 혹은 어쩌다 실수로 보게 되면 중간에 끄지도 못한다. 그 귀신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면 또 며칠간 잠을 못 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열린 결말’로 끝나는 공포물이다.) 이미 보기 시작한 공포물은 최대한 귀신이 훅 하고 튀어나오는 장면이 없고 마지막에는 귀신이 퇴치되기를 바라며 끝까지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같이 볼 사람이 집에 있다는 것. 그렇게 나는 남편을 옆에 앉혀두고 <어둠 속의 미사>를 이틀 만에 정주행 했다.



다행히 귀신이 훅훅 튀어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았다. 무섭거나 보기 섬뜩한 장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내가 특히 불편해하는 ‘여성 주인공을 관음하는 듯한 시선’이 없어서, 결론적으로 <어둠 속의 미사>는 드물게 ‘내가 좋아하는 공포물’이 되었다. 종교와 생명, 축복과 구원, 인간의 욕심 등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지는 작품이지만 보실 분들을 위해 남겨두고, 나는 여기서 주인공의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자 한다.


워렌은 사방 약 30마일 이내에는 육지가 없고, 육지에 가려면 하루 두 번 있는 배편을 이용해야만 하는 작은 섬, 크리켓에 사는 고등학생이다. 크리켓 섬에는 한 때 수백 명이 살았지만, 몇 년 전 있었던 원유 유출 사고 후 수산업이 침체되면서 하나둘 떠나고, 이제 단 127명의 사람들만이 살고 있다. 학교는 당연히 ‘통합 학교’로, 단 두 개의 교실에서 초중고등학생이 섞여 수업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의 구심점은 섬 가운데 있는 ‘성 패트릭 성당’이다. 워렌은 이 성당에서 복사(服事)로 일하며 모든 미사에 성실히 참석한다. 본인의 신앙심이 깊다기보다는 부모님이 원하는 바에 따른 것 같기는 하지만.

또한 워렌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를 도와 뱃일을 하고 나서 학교에 가는 착한 청소년이기도 하다.


그런데 워렌은 마리화나를 피운다. 밤이면 친구들과 몰래 카누를 타고 본섬에서 약간 떨어진 ‘어퍼즈’라는 곳에 가서. 그 와중에 ‘코딱지만 한 가톨릭 공동체에서 겉돌 수밖에 없는 무슬림'인 데다 '아버지가 보안관이라는 이유로 다 같이 불량한 짓을 할 때 잘 끼지 못하는’ 친구 알리를 끼워주는 의리(?)도 있다.



유치한 질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머릿속에 떠올라버리고 말았다. 워렌은 바람직한 청소년일까, 문제아일까? 물론 가장 적절한 대답은 "그렇게 흑 아니면 백, 같은 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이겠지만.


워렌이 카누를 타고 나가 마리화나를 피우는 장면에서 나는 그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오밤중에 카누라니, 뒤집히면 어쩌려고! 그렇게까지 해서 기껏 한다는 게 마리화나 피우는 거야? 게다가 위험하게 인적 없는 데서 뭐 하는 거야, 이거 지금 공포물이라고!(아, 이건 아닌가.)

여하튼 내가 워렌의 부모라면, 아들의 재킷 주머니에서 마리화나를 발견하면 눈앞이 캄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에게 마리화나는 약한 수준의 일탈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카테고리가 마약 아닌가.


하지만 '내 자식'이 아니라 '남의 자식'이라면, 그러니까 이성을 조금은 차릴 수 있는 상황에서 보면 어떨까.

워렌은 성당에서 복사로 일한다. 부모가 바란다고 모든 자녀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닌데, 워렌은 그렇게 한다. 게다가 워렌은 매일 아버지를 도와 새벽마다 뱃일을 한다. 뱃일 후에 학교에 갈 때면 어쩔 수 없이 몸에 남아있는 비린내가 사춘기 소년에게 썩 달가운 일은 아닐 텐데도. 결국 부모를 위해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뱃일도 돕는 셈인데, 한창 반항적일 나이에 이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여리고 근본이 착한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를 같이 노는 무리에 끼워주는 아량도 있다. 그렇게 무리에 끼워서 함께 한다는 게 '마리화나 피우기'였다는 건 문제지만, 알리에게는 그 무리에 받아들여진 것이 중요하고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워렌은 알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친구일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마리화나는 국가에서 마약으로 지정했을 뿐, 중독성이 니코틴보다도 약하다고도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아마 마음만 먹으면 금방, 담배보다 쉽게 끊을 수 있을 게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워렌이 남의 자식일 때다. 침착한 마음으로 상황을 분석할 여유가 있을 때. 가정이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지 않을 때. 그러니까 워렌 엄마, 워렌 착한 애인 거 누구보다 자기가 잘 알잖아, 걱정 말아요, 다 잘 될 거야, 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일 때.



굳이 마리화나 같이 극단적인 예가 아니어도, 내 자식의 일에는 객관적이 되기가 쉽지 않다. 아이가 처음으로 글자를 읽었다고 “우리 애는 천재인가 봐!”라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부모는 객관적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자식에게 벌어지는 일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너무 커서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큰 나무가 코 앞에 있으면, 숲 전체는 커녕 나무 전체조차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럴 때,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아이가 100% 모범 청소년은 아니지만 구제불능 문제아도 아니고, 일탈 행동을 했지만 그간의 행적으로 보았을 때 근본 심성이 비뚤어진 아이는 아니니 아마 곧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믿고 기다릴 수 있는 현명함과 여유가 있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어둠 속의 미사> 감독 마이크 플래너건이 이 글을 읽는다면, 자기 작품을 보긴 한 거냐고 어이없어하겠지? 네, 분명 제대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만 워렌에 대해서 생각을 좀 많이 했을 뿐이죠.

이전 11화 팬더보다 큰 거위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